요즘 세상인심이 흉흉합니다. ‘관습헌법’이 쓸고 간 자리, 파고(波高)가 높습니다. 구구한 법리와 논변이 있겠지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정치도, 언론도, 대립일변도로 치닫고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예의는커녕 증오만 실은 생경한 언어가 난무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땅이 싫어졌다, 이민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떠나는 사람도 많고요.
이 세상 어디에 천국이 있겠습니까만 최소한 지옥을 벗어나려는 소망은 막을 수 없지요. 흔히 선진국이라는 곳은 변화가 더디지요. 그래서 무료합니다. 불과 몇 십년 만에 남의 나라 몇 백년 역사를 가로지른 한국은 지옥일 수밖에 없답니다. 그래도 극도의 역동성이 춤추는 ‘신나는 지옥’이라고 합니다.
한때 이 땅의 지식여성들에게는 외국, 그중에서도 ‘아메리카’는 적어도 관념적 대안이 되었지요. 다시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의 구절입니다. 혈연 없이 법연(法緣)뿐인 젊은 남녀의 변. “우리에게는 길이 없지 않다. 외국엘 나가든지.”
가부장제의 속박이 없고 남녀에게 균등한 기회가 열린 땅에 대한 가슴 부푼 동경이었지요. 한국산 중에 국제 경쟁력이 가장 높은 품목은 여성이라고들 합니다.
‘뚝심 좋은 마산 색시, 미국장관 10년 해 보니’(1996년)는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가족법의 굴레를 벗어나 아메리카 땅에서 주 장관과 연방의 현직에 오른 전신애의 성공담이 빛나지요. 그러나 김지원의 ‘잠과 꿈’(1987년)을 비롯한 각종 ‘이민문학’에서 보듯이 서울을 떠난 숙희에게 낙원이 바로 열리는 게 아닙니다. 호주, 뉴질랜드, 유럽, 동남아. 이제는 무한정 사교육비를 감당 못해, 자식의 장래 때문에 떠난답니다. 그럴 수 있지요.
정이현 작가, 나이 때문에 고민이시라고요? 서른, 결코 잔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법에는 아주 어린 나이에는 혼인 못한다는 규정은 있지만 몇 살까지 시집 장가들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런 ‘관습헌법’도 없고요.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 그렇지요. 그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머니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나는 아직도 하늘이 여성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은 어머니가 될 기회를 준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 작가, 모든 사람이 떠나도 작가는 떠날 수 없습니다. “외국은 잠시 여행에 빛나고 수삼년 공부나 하는 곳이지.” 오래전에 마종기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이렇게 이방인의 넋두리를 읊었지요.
문학은 삶입니다. 모국어는 문학의 자양분입니다. 작가에게는 모국의 흙냄새, 피냄새, 땀냄새 없이 농익은 삶도 문학도 설 수 없습니다. 정 작가님, 내 땅을 지키며 치열한 삶의 열매로 자신과 시대를 그리는, 그런 당당한 문학인이 되기를 빕니다. 이 가을에 드리는 단풍빛 축원입니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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