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대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가 사상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한 가운데 황창규 반도체 부문 사장이 500명의 경영간부를 소집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반도체 사업이 사양사업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한 가운데 황 사장은 자신이 직접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보여주면서 장장 4시간의 연설을 펼쳤다. 내용은 반도체는 절대 사양사업이 아니며 과거 개인용 컴퓨터(PC)시장에서 휴대전화, 게임기, 개인휴대단말기(PDA), 디지털 카메라 등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의 법칙’이라고 명명된 메모리 신(新)성장론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리더가 이런 비전을 제시하고 임직원을 열정적으로 설득한 결과는 놀라웠다. 미국의 마이크론과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이 모두 적자에서 헤매고 있을 때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그해 12월 다시 흑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박병무 뉴브리지캐피털코리아 사장은 기업 인수합병(M&A) 전문가다. 그는 김&장의 변호사를 거쳐 영화사 시네마서비스와 게임업체 넷마블 등 10여개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거느린 현재의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를 일군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보면 기업가로서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서울대 전체수석 입학,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 하버드 로스쿨 졸업…. 엘리트 중의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그의 노하우는 남달리 뛰어난 두뇌가 아니었다. 공기업 임원이었던 아버지가 자신에게 과외교육을 시켰다는 이유로 조기퇴직하게 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죽을 각오로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이처럼 대한민국 기업현장에서 현재 뛰고 있는 핵심인재 15인의 열전이다. 경제부 기자들과 인사전문가가 함께 쓴 이 책은 이들 개개인의 성공비결을 추적하면서 3가지 부류로 나눴다. 황 사장과 박 사장, 백우현 LG전자 사장, 홍영도 KTF 상무, 최정규 맥킨지 서울사무소 공동대표는 전문성과 다양성을 겸비한 인재다. 이들은 스페셜리스트인 동시에 제너럴리스트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 조운호 웅진식품 사장, 장세화 대교 대표이사, 박상환 하나투어 사장은 창조적 인사다. 이들은 형식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발상의 전환으로 일가를 이룬 경영인이다.
양덕준 레인콤 사장, 정오묵 신세계 상무, 최인아 제일기획 상무, 윤제균 두사부필름 대표, 조의주 푸르덴셜생명보험 상무는 도전적 인재다.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남다른 용기와 실험정신으로 무장해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였다.
그렇지만 이런 분류는 다분히 자의적이다. 이들은 모두 부단히 자신을 계발하고, 남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도전에 과감히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두가 그들과 같은 핵심인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미덕은 우리 사회 곳곳에 아직 신뢰할 만한 인재들이 포진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게 아닐지.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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