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시인이 지난달 30일 서울서 부산 가는 고속철에서 시 ‘죽편1-여행’을 낭송하던 순간, 속력을 내던 고속철은 마침내 시속 303km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차 안은 고요했고, 시인은 속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를 읊고 있었다. 대꽃 피는 마을 어디인지 몰라도 거기까지는 백년 걸린다고.
이날 고속철에는 한국 최고의 시인들이 거의 다 모였다. 한국시인협회(이하 시협) 소속 시인 185명이 탔고, 일반 승객 750여명이 함께 승차해 열차 내 방송으로 퍼지는 시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11월 1일 ‘시의 날’을 맞아 시협이 한국 현대시 100년을 기념해 ‘시여, 영원하라’란 기치 아래 시의 대중화를 위해 마련한 ‘고속철 시 낭송회’였다.
저명 시인들이 자작시를 낭송했다. 김남조 시인이 ‘올해의 가을’을, 노향림 시인이 ‘가을 편지’를, 이가림 시인이 ‘석류’를, 이근배 시인이 ‘명사산’을 각각 외웠다. 사냥꾼 모자에 이중초점 안경을 쓴 정진규 시인, 선글라스를 쓴 성찬경 시인, 아래위 검은 옷을 입은 신달자 시인…승객들은 시인의 음성에 잠겨 창 밖을 보고 있다가 낭송이 끝난 뒤에도 여운을 만끽하려는 듯 한참 지나서야 박수를 치곤했다.
고속철은 강산의 단풍이 남하한 경로를 따라 내려갔다. 억새가 흔들리는 둔덕과 오후의 아지랑이에 휩싸인 골짜기, 교각이 비친 수면(水面)과 산비탈의 무덤들, 하얗게 빛나는 비닐하우스, 솔숲 속의 교회당…차창 밖의 세계가 시(詩)가 꾸는 꿈처럼 아스라하게 지나갔다.
![]()
|
시협은 병상의 원로 김춘수 시인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승객들 가운데 김 시인의 시를 낭송할 사람을 즉석에서 뽑았다. 이날 전역한 군인 김동우씨(23), 31일 부산역 앞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박만규씨(29), 친구 만나러 간다는 정진선씨(23) 등이 마이크를 잡고 ‘꽃’ ‘서풍부’ 등을 외웠다. 승객 양희태씨는 “이번 ‘시인 열차’를 타기 위해 대전서 서울까지 올라갔다”며 “맑고 깨끗한 시인들을 만나 마음에 뭔가 가득 담아간다”고 말했다.
“개똥벌레의 정기총회 같은/하늘의 별자리./구경 치곤 세상에서 으뜸이다./그러나 저 별까지의 엄청난 광년의 거리가 있기에/무시무시한 불덩어리들의 모임이/저러한 신비의 향연이다.”
성찬경 시인이 낭송한 자작시 ‘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의 일부다. 경부고속철은 400km 남짓한 거리를 달리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그러나 시인들은 여전히 ‘머나먼 아름다운 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만 같았다.
종착역에 다다른 시인들은 곧바로 수영구 민락동의 부산MBC 강당으로 옮겨 독자들과 두 번째 시 낭송회를 가졌다. 유치환 노천명 박재삼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선배 시인들의 시를 백발이 성성한 후배들이 외웠다.
낭송이 끝나고 모두들 강당을 떠났지만 무대에는 아직도 커다란 현수막이 내려지지 않은 채 걸려 있었다. “시여, 영원하라”.
부산=권기태기자 kkt@donga.com
오늘 ‘詩의 날’대학로서 기념행사
한국현대시인협회(회장 박재릉)는 1일 오후 6시 서울 대학로 흥사단 대강당에서 ‘제18회 시의 날’ 기념행사를 갖는다. 현기영 문예진흥원장, 문덕수 예술원 회원, 신세훈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 150여명의 문인들이 모여 기념강연 ‘시의 날에 즈음한 한국시의 현 주소’, 시창(詩唱) 등의 특별공연을 갖는다. 02-323-2227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