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자 주간 교수신문에 김 교수가 이 교수의 저서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비평하며 시작된 이 논쟁은 “조선이 내재적으로 발전할 싹을 가졌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됐다”는 ‘내재적발전론’(국사학계)과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경제사학계)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진행 중이다. ▶논쟁 경과는 표 참조
이에 정치학 및 국제정치학 연구자들의 학술모임인 ‘독립신문 강독회’(총무 이원택 서울대 BK21 법학연구단 교수)는 지난달 30일 서울대에서 월례발표회를 갖고 “내재적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 논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정치학, 철학, 사회학 등 여타 분야로 지평을 넓혀가야 논쟁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날 발표회 참석자들은 올해 8월 도쿄대에서 발표된 강상규 박사(서울대 외교학과 강사)의 학위논문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전형기(轉形期)의 군주 고종을 중심으로’를 놓고 고종과 그의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했다.
이원택 연구교수는 “문명사적 전환기에 고종이 추진한 ‘구본신참(舊本新參·옛것을 근본으로 새 제도를 참작함)’의 근대화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며 “자유와 평등사상이 빠진 근대화는 근대화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동택 성균관대 연구교수(정치학)는 “고종은 보수적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이에 필요한 제도를 갖추지 못했다”며 “고종은 개혁의 전망과 전술은 갖추었지만 그 둘을 매개할 전략적 사고와 행위를 결여했다”고 말했다.
정용화 연세대 연구교수(외교사)는 “고종은 조선이 처한 내외적 위기를 신권(臣權)과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민의를 제거함으로써 돌파하려고 했다”며 “이는 국가안보와 정권안보 중 정권안보에만 집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강 박사는 “고종은 1870년대부터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다가 조선의 정치적 지형과 외부에서 닥친 위기에 의해 좌절했다”며 “고종(시대)을 평가하기 이전에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 대한 우려 섞인 평가도 뒤따랐다.
김영작 국민대 교수(정치외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극복하려는 내재적 발전론측의 ‘팩트 파인딩(사실 찾기)’도 의미 있으나 지나친 일반화는 위험하다”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조선 패망의 내재적 원인을 찾을 수 없게 된다”고 밝혔다.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앞으로 정치학-국제정치학자들 사이에서 고종시대사 연구가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고종시대에 대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 논쟁 경과 (교수신문 인터넷판 7월14일~10월29일) | ||
| 이태진 교수 (내재적 발전론) | 김재호 교수(식민지 근대화론) |
1차 논쟁 | 고종, 자주·근대적 계몽군주.근대화노력을 일제가 좌절시켜(이태진 저 ‘고종시대의 재조명’·2000년) | 고종, 왕정극복 의식 부재.고종의 ‘民國’이념으론 근대사회 불가능 (7월14일) |
2차 논쟁 | 중추원 등 근대국민국가제도 시작(8월26일) | 중추원은 자문기구 불과.신분제사회로 ‘국민’개념 성립 불가 (8월30일) |
3차 논쟁 | 고종,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혁파.대한제국 예산도 중추원에서 심의(9월10일) |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행하며 자본축적, 근대적 경제성장에 필요한 각종 제도 마련 실패 (9월29일) |
4차 논쟁 | 대한제국의 근대화 성과는 경제지표로도 확인 가능 (10월8일) | 대한제국은 전근대적 지대(地代)추구 체제(10월17일) |
5차 논쟁 | 고종은 개명군주 (10월29일) | 고종은 도학군주일 뿐 (10월21일·서울대 이영훈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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