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유능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2년 만에 졸업하면서 각국 외교관을 포함해 8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유창한 영어로 졸업생대표 연설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 당시 졸업연설의 제목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었는데 이는 이후 그의 일관된 목표였다.
급진개혁을 도모하다가 체포돼 6년여의 옥살이를 하고 나와 러일전쟁 직후 구국의 사명을 띠고 미국에 보내져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또 조지 워싱턴대와 하버드, 프린스턴대를 거치며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5년만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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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해 전국을 돌며 독립사상 고취에 주력한 그는 105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미 체포대상 1호였다.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교포를 대상으로 교육과 언론사업에 주력한 그가 정치가로 떠오른 것은 3·1운동(1919년) 이후 생겨난 5곳의 임시정부에서 모두 그를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로 추대하였다. 그만큼 그는 독립운동가 중에서 유능한 인재였다.
● 공산화를 막아낸 용미주의자
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하는 것은 오해다.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이승만은 ‘미제의 앞잡이’가 아니었다. 그는 광복 전부터 미국의 기피인물이었다. 미국은 1947년 중반까지 말 안 듣는 이승만보다는 김규식을 더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국식 제도를 지지했다는 점에서는 ‘숭미(崇美)주의자’였지만 실제 외교에서는 철저히 미국을 이용하는 ‘용미(用美)주의자’였다.
● 대한민국의 합법적 설계자
이승만은 1948년 제헌국회의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제정의 총책임자였다. 당시 제헌국회에서는 내각책임제를 구상했지만 이승만은 건국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또한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다. 1948년 총선거는 유엔의 감시 하에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총선에 반대한 사람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여기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총선을 통해 구성된 국회의 압도적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대한민국을 공산화로부터 막아내고 민주주의의 틀을 구축함으로써 오늘날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양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휴스턴대 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고려대와 한림대 사학과 교수를 거쳐 1996년부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갑오경장연구’(1990년·일조각), ‘이승만의 삶과 꿈’(1997년·중앙일보사),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1998년·연세대출판부),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 생활(1889∼1904년)과 옥중잡기 연구’(2002년·연세대출판부) 등이 있다.
▼제5강서 쏟아진 질문들▼
청소년 역사강좌 제5강에 참석했던 300여명의 청중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유영익 교수의 긍정적 재평가를 낯설게 여기는 듯했다. 이에 따라 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강호균군(17·단국대부고 2학년)은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해도 그 후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고 국민정서를 무시하며 친일세력을 옹호하지 않았는가”라며 매서운 질문을 던졌다.
유 교수는 “이 대통령의 12년 집권기간 비리와 실정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악질 친일파를 가려내 숙청하지 못한 점은 그의 통치사에 오점으로 남았다”면서 “그러나 모든 인물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정외과 2학년 이승현씨(20·여)는 “분단의 원인이 이승만이 아니라 소련에 있다고 했지만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김구 등의 노력을 외면했던 것에 대한 변명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유 교수는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미소 연합국의 힘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한국문제를 처리하는 데 가장 발언권이 강했던 것은 미국과 소련이었다”면서 “따라서 소련과 미국의 의도를 배제한 채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순성군(17·잠실고 2학년)은 “이 대통령이 미국이 아닌 유엔을 통해 독립정부 수립을 기도했다고 하지만 당시 유엔은 미국의 영향 아래 있지 않았는가”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유 교수는 “물론 미국의 입김이 강하긴 했지만 미국이 개입한 부분은 없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 임영신 등을 뉴욕 유엔본부로 파견해 직접 로비를 펼친 결과로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이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좌참가 사제지간 즉석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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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제5회 강연이 끝난 후 중학교 때 사제관계였던 서울 언주중 국사교사 송인숙씨(41)와 진선여고 1학년 이혜빈양(16), 청담고 1학년 이은주양(16)이 즉석에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혜빈양이 2회 강연을 들은 뒤 은사인 송 선생님과‘ 중학친구인 은주양에게 권유해 이들은 3회부터 함께 강연을 들어 왔다.
혜빈양은 “오늘 강연은 평소 이승만에 대해 주변 어른들이 말씀한 내용과 너무 달라 혼란스럽다”면서 “부정과 긍정의 양면을 종합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오늘 강의 역시 너무 긍정적인 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은주양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반쪽자리 정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며 “결과적으로 북한의 공산화보다는 남한의 민주화가 시대적 흐름에 부합했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선택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혜빈양은 “그렇지만 백범 김구의 암살에 이승만이 관여된 문제도 있고 과연 김구나 김규식의 중도노선과 비교해 이승만의 노선이 옳았는가는 좀더 고민할 문제인 것 같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은주양은 부정과 긍정을 종합한 시각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으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우리가 정작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 형식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송 교사는 “이승만이 젊은 시절 천재였다는 것은 새로 알게 됐고 그가 뛰어난 현실주의자였다는 강연 내용에는 동의한다”면서도 “과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포기하고 단독정부를 추진한 것을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주 토요 역사강좌 안내(제6강)▼
▽일시=6일 오후 3∼4시반
▽장소=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
▽주제 및 강사=‘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제6강의 이해를 돕는 책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김영호·두레출판사·1998년)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사회평론·2002년)
△통일한국의 패러다임(김영호·풀빛·1999년)
■강좌에 관한 사항은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02-920-7089)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수강료 없음.
■지금까지의 내용은 동아닷컴(www.donga.com)'2004 청소년 역사강좌' 코너에 실려 있습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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