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8>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4일 18시 27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번쾌는 다음날 일찍 외황성 서쪽 20리쯤 되는 곳에서 왕무(王武)와 정거(程d)가 이끄는 초나라 군사와 맞닥뜨렸다. 원래 왕무와 정거는 수양성에 의지해 한군의 진격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저희편의 머릿수만 믿고 앞뒤 없이 덤비는 한군(漢軍) 선봉대를 쳐부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한 번 더 싸워 적의 기세를 꺾고, 정히 머릿수에서 밀리게 되면 그때 수양성으로 돌아가 농성하자.”

왕무와 정거는 그렇게 의논을 맞추고 들판에 진세를 벌여 기다리다가 추격해 오는 번쾌를 맞았다. 하지만 초나라 장수들은 장터거리에서 개백정 노릇할 때의 불우한 날들로 단련한 번쾌의 분발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 군사들도 한중(漢中)에서 나온 이래 줄곧 이기기만 해온 한군의 사기와 자신감을 당해내지 못했다. 거기다가 소문과는 달리 초나라 군사의 머릿수도 한군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어 처음부터 이기기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잘못되었구나. 들판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높고 든든한 성벽에 의지해 버티면서 우리 대왕께서 돌아와 구원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왕무와 정거가 그렇게 후회를 했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대오고 진세(陣勢)고 가릴 것 없이 그저 한줄기 거센 홍수처럼 밀고 드는 한군 앞에 초나라 군사들은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번쾌가 미리 갈라 보낸 5천 인마가 함성과 함께 등 뒤에서 나타나 길을 끊자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두려워 말라. 죽기로 길을 앗아 수양으로 돌아가자. 성안으로만 들어가면 모두 살 수 있다!”

왕무와 정거가 그렇게 군사들을 다그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총중에도 길을 앗아 달아난 날래고 모진 몇몇을 빼고는 모두 무기를 내던지고 한군에게 항복해버렸다. 그걸 보자 왕무와 정거도 생각이 달라졌다. 군사들 없이는 돌아가 봤자 성을 지킬 수 없고, 성을 지키지 못하면 곱게 보아줄 패왕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왕에게 항복해 목숨이나 부지하며 뒷날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네.”

마침내 왕무와 정거는 그렇게 의논을 맞추고 군사들과 함께 번쾌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항복한 군사 거의가 초나라 사람이요, 그 대부분은 역시 초나라 사람인 한왕 밑에서 다시 싸우기를 원하니 결국은 한군이 3만 가까이 늘어난 셈이었다.

그런데 그날 한군의 머릿수가 늘어난 것은 그 3만뿐이 아니었다. 본진으로 돌아간 번쾌가 은근히 싸움에 이긴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데 다시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남쪽에서 또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20리 밖에 이르렀는데, 그 기세가 어제 왔던 왕무와 정거의 군사들에 못지않다 합니다.”

“항왕은 대군과 더불어 제나라에 붙잡혀 있으니 와봤자 이름 없는 장수에 갈가마귀떼 같은 잡병일 것이다. 이번에는 누가 나가보겠는가?”

번쾌의 승리로 더욱 보이는 게 없게 된 한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호기롭게 물었다. 마침 곁에 있던 장수들이 저마다 나서 싸우기를 원했다.

그때 먼저 전갈을 가져 온 군사를 뒤따르듯 또 다른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저편에서 사자를 보내왔습니다. 대왕을 뵙고자 청합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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