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스물아홉, 서른아홉… 방황 그리고 희망

  • 입력 2004년 11월 11일 16시 08분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날아만 가는 세월이 야속해 붙잡고 싶었지. 내 나이 마흔 살에는∼”(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서른과 마흔.

나이 먹는 일에 대해 이토록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시기가 또 있을까.

노래뿐 아니라 서른과 마흔을 다룬 책들도 각각 20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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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청춘을 떠나보내고, 중년에 접어드는 때라서 그런 걸까.

서른, 마흔을 앞둔 기대 혹은 두려움은 29, 39세 때 최고조에 이른다.

9로 끝나는 나이에 나쁜 일이 많다고 믿는 ‘아홉수’도 실은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데 대한 두려움에 더 가깝다.

성인이 된 뒤에도 성장통은 여전하다.

1976년생과 1966년생들은 우리 나이로 올해 29, 39세이다.

서른, 마흔을 두 달가량 남겨놓은 이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 29=서른, 잔치는 끝이 날까?

‘삼십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에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다.’

독일 작가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소설 ‘삼십세’는 이렇게 시작된다.

1976년생 용띠, 이제 서른이 코앞이다. 20대의 막바지에 노래방에서 ‘서른 즈음에’를 부르며 훌쩍거리는 시기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삶의 기로에 선 고민 많은 여주인공 중엔 29세가 많다. 애인에게 차이고 직장에서 밀려난 ‘싱글즈’의 나난(장진영), 애인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내 남자의 로맨스’의 현주(김정은), 옛 남자들의 사랑이 거짓임을 알고 복수심에 불타는 ‘S 다이어리’의 지니(김선아)…. 이들이 29세가 아니라 25세였다면 상실감은 그리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9세들은 서른을 떠올리며 선택의 문제, 완전한 독립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몸살을 겪는다. 취업과 결혼이 늦어지면서 이 시기에 비로소 사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1976년생 30명을 대상으로 한 주관식 설문조사에서 17명은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데 능력이 부족하다’ ‘아줌마, 아저씨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서른이 되는 게 두렵다고 답했다. 미혼인 경우 서른 전에 결혼하라는 주변의 압력을 힘들어 했다(5명).

아직 취업하지 못한 29세에게 ‘서른’은 숨통을 죄어 온다. 명문대 졸업생 김모씨(여)는 원하는 직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 후 계속 취직 시험을 봤지만 결과는 번번이 낙방. ‘남들은 안정을 찾아가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그에게 서른이란 나이는 그냥 ‘끝’처럼 느껴진다.

독일 작가 브리기테 아담은 그의 책 ‘서른 살, 뭔가 다르게 살 순 없을까?’에서 이 같은 서른 살 전후의 위기는 ‘중년 위기의 예고편’에 해당된다고 지적했다.

반면 대학원생 나은하씨(여)는 서른을 기다린다. 학교에서는 ‘노땅’ 취급을 받지만 30대 집단에서는 또다시 막내가 아닌가. 설문조사에서는 그저 ‘스물아홉의 혼란이 너무 싫어서 빨리 서른이 되고 싶다’는 대답도 있었다.

얼마 전 짧은 머리에 뽀글뽀글한 일명 ‘장정구 파마’를 하고 나타나 주변을 경악하게 한 민영의씨(동아TV PD). 그는 “서른 전에 귀고리와 문신, 파마를 하고 싶었지만 다른 것들은 어머니가 반대해 파마만 했다”며 “두 달 뒤 서른이 되면 파마를 풀겠다”고 말했다.

설문조사에서도 ‘서른이 되기 전에 하고 싶은 일’로 여행(13명), 연애(7명) 등이 많았지만 ‘초미니 스커트 입기’ 등 서른 이후에 선뜻 하기 힘들 듯한 일을 꼽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물아홉의 일기’라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윤세진씨는 3년 전인 29세 때부터 이곳에 일기를 적어 왔다. 살면서 29세 때처럼 불안하고 걱정 많았던 적이 없었다는 윤씨는 그 고민들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카페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그의 일기 가운데 한 토막.

‘서른이란 나이가 왜 그렇게 걱정됐을까.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어느 새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 아버지 회갑이 있던 해에 나는 아버지 나이의 절반이 됐다. …인생을 반으로 나눈다면 전반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준 인생이고 후반은 내가 만들어 가야 한다. 이젠 힘들더라도 내 인생 내가 결정하며 살고 싶다.’

○ 39=마흔이 불혹(不惑)이라고?

“난 아직도 마흔이 실감이 안나. 사실 별 의미 없잖아?”

“아냐. 힘든 나이지. 인생이 상승에서 하강으로 바뀌는 건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5일 저녁, 다음 카페의 1966년생들 모임인 ‘1966년 그 어느 날’ 회원 9명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주점에 모였다. 30대의 마지막 가을을 아쉬워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이들에게 마흔이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다.

추철오씨는 “마흔은 모험하기엔 어려운 나이다. 지금 기반 위에서 안정화의 길을 찾자는 쪽으로 자주 생각이 기운다”고 했다. 반면 김구기씨는 “난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배울 것도 많고, 그냥 마흔을 ‘불혹’ 대신 ‘이립(而立·30세)’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마흔은 ‘꿈’과 어울리지 않는 나이일까. 1966년생 38명을 대상으로 주관식 설문조사를 해 봤다. 24명은 마흔을 맞아 심란하다고, 14명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심란한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 ‘책임감’ ‘평균수명의 절반이라서’ 등 갖가지였다.

한 응답자는 “서른이 될 땐 이상주의자였는데 마흔을 앞둔 지금은 현실에 집중하게 된다. 남은 삶에서 뭘 이룰 것인지, 몇 안 되는 선택을 놓고 갈등한다”고 토로했다.

반면 마흔을 기다린다는 다른 응답자는 “20대는 그 이후를 상상할 수 없었고 30대는 졸지에 맞아 혼돈이었지만, 40대는 세월의 힘과 아름다움을 아는 상태에서 맞기 때문에 기대로 가득 차 있다”고 썼다.

영화평론가 겸 임상심리학자 심영섭씨(여)도 39세인 지금을 평온하다고 느끼는 쪽이다. 29세 시절에 대해 첫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렸던 기억만 갖고 있는 그는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고 그 일을 할 자신도 있어서 편안하다”고 했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 부모에 대한 연민이 커져가는 것도 서른이 될 때와는 다른 점이다.

마흔을 맞는 다른 이들도 자기 길에 대한 최소한의 확신이 있을까. 설문조사에서 ‘마흔이 불혹’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동의한다’는 사람이 25명이었다. 이유는 ‘이제 앞만 보고 갈 수 있다’ ‘다른 길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단호한 응답에서부터 ‘포기하는 게 많아서 불혹’ ‘새로운 것을 시도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응답까지 다양했다.

반면 동의하지 않는 13명 중 한 응답자는 “마흔이야말로 객관적 상황이 주는 부담과 자신의 욕구가 충돌하는 첨예한 나이”라고 썼다.

김병호씨(푸르덴셜생명보험 라이프플래너)도 ‘첨예한 나이’를 치열하게 맞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년 남짓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뒀다. “조직이 주는 안정감이 컸지만 평생 기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성장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는 ‘마흔이 넘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단을 내렸다.

‘거친 벌판’에 나선 뒤, 그는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7시 이전에 일하러 나온다.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려고 애쓰면서 스트레스는 커졌지만, 삶의 비전을 내가 만들어간다는 데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40대에 바라는 것은 ‘경제적 자유’와 ‘남을 위한 삶’이다. 스스로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유가 생기면 나누는 삶을 살고 싶은데 아이들 교육 문제를 생각하면 사립학교에도 보내고 싶고, 고민만 쌓여 간다.

“계속 고민하면서 살 것 같다”는 그에게 ‘마흔이 되기 전에 꼭 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아쉬운 일’을 묻자 “하프마라톤 완주를 하려고 했는데 못해서 안타깝다”고 했다.

같은 질문을 설문조사에서도 던져 봤다. 가장 많은 10명이 ‘목적 없는 여행’ ‘혼자 하는 여행’ 등 여행을 꼽았다. 그 다음으로는 각각 5명이 ‘경제적 여유’ ‘창업·전직’ ‘뜨거운 사랑’을 아쉬운 일로 들었다.

글=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채지영기자 yourcat@donga.com

사진=강병기기자 arche@donga.com

그래픽=이진선기자 geranum@donga.com

▼‘아홉수’ 근거 희박… 단위 바뀜에 대한 불안감▼

1966년생들의 모임인 ‘1966년 그 어느날’ 회원 9명이 5일 저녁 한자리에 모여 30대 마지막 가을을 아쉬워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강명기기자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아홉수’는 그 근거가 희박하다.

역학인 김광일씨에 따르면 주역(周易)에 숫자 9가 퇴보와 억압을 함축하고 있다는 딱 한 문장이 있는 것 외에는 어떤 역학책을 뒤져도 숫자 9가 좋지 않다는 내용은 없다.

김씨는 “음양오행에서 9는 금(金)을 뜻하는데 금은 살성(殺星)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다 보니 주역에 나오는 얘기와 함께 확대 해석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히려 9는 중국에서 행운의 숫자다.

일반적으로 나쁜 일은 더 잘 기억되기 마련이며 그런 일들이 아홉수에 일어나면 ‘이 고비를 넘겨야 30대 혹은 40대에 잘 된다’는 식의 충고가 많아 아홉수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국제의명연구원 정경대 원장은 “건강과 운세 등을 예측할 때 반드시 20∼29세, 30∼39세라는 식으로 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사람에 따라 22∼31세, 32∼41세, 또 어떤 이는 23∼32세, 33∼42세라는 식으로 각자 다르다”며 “이는 사람마다 운명의 진행과정이 달라 운명의 전환 시기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9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됐을까.

용인정신병원 하지현 진료과장은 “10진법의 세계에서는 9는 꽉 찬 숫자이며 9가 넘으면 단위가 새롭게 바뀌므로 ‘마지막’이라는 느낌을 준다”며 “이에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9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

나이뿐만이 아니다. 연도에 9가 들어가는 세기말마다 종말론이 팽배했으며 천년 주기의 밀레니엄이 바뀔 때는 더욱 심했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한 수많은 예언가들이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예언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심리적 공황상태가 2000년 직전까지 이어졌었다. 사실 새로운 밀레니엄은 2001년에 시작하는 것이었는데도.

나이든 연도든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다음 단계에 대한 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습관이다.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등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사람들이 연말마다 망년회를 열고 또 신년계획을 세우는 것도 그런 이유다.

또 실제로 아홉수에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사회적 사이클이 맞춰져 있기도 하다. 19세에 대학 입시를 치르고 29세 전후에는 결혼과 사회생활이 시작되며 39세 전후에는 직업적 생산성이 최고조에 이르며 49세 전후에는 다가오는 노년을 준비해야 한다.

하 과장은 “아홉수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은 어리석지만 이 시기를 지난 10년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10년을 계획하는 인생관리의 전환점으로 삼는다면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채지영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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