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쓰는 일, 외롭고 고통스럽지요? 나는 작가는 못 되지만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만합니다. 일류 작가가 될 자신이 없어서 이류 법률가가 된 사람이 많아요. 나도 그런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재능은 고사하고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걸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문인은 학교 교육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믿었어요. 우리 시대에는 사실 그랬고요. 내 항상 기원하고 주문하듯이 작가는 온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일류가 되지 못해요. 문학의 길에는 일류 중의 최일류만이 생전에 타인의 주머니 신세를 지지 않거나, 사후에도 기억되지요.
정 작가 말대로 온 세상이 인터넷, 정보의 홍수 시대입니다. ‘휴대전화가 안 터지는 곳이면 그 어디나 살갑다.’ 지난해에 시인 황동규는 이렇게 읊더군요. 잠시나마 문명과 정보의 홍수를 피해 나선 여정에 휴대전화를 쥐고 가는 아이러니, 그게 현대인의 삶인가 봅니다. ‘전파의 바다에 나만의 신호를 보내고 싶어요.’ 그래야지요. 정보가 아니라 체험이 작품의 자양분이라면 내 몸 속에 체화된 삶의 이야기가 아니면 수명이 짧지요. 작품 속에서 자신이 쓴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작가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마감시간에 쫓겨 허둥댔거나 채팅하듯 가벼운 기분으로 썼던가 봅니다. 그의 장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듯했습니다. 왜 옛날 선배 문인들이 그처럼 술을 퍼 마셔 댔는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명동백작’들은 죽고 싶었던 것이지요. 삶과 죽음이 한 자 거리였던 격동의 시기에는 죽은 자만이 살아남았어요. 윤동주를, 김수영을 보세요.
그러나 이제는 질기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박경리처럼 통영 앞바다를 찾고 박완서처럼 ‘그 남자네 집’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듯합니다. 정이현 작가, 설마하니 마감시간을 정해 두고 작품을 쓰지는 않겠지요. 길게 보세요. 쥘 르나르의 ‘자연의 이야기들’의 한 구절입니다. ‘그림자로 밭을 가는 소’라는 제목의 시지요. “기우는 햇살을 받으며 소 두 마리가/그림자를 쟁기삼아 느릿느릿 들판을 갈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천재학자, 정수일 선생이 옥중수기를 펴냈어요. ‘우보천리 우답불파(牛步千里 牛踏不破)’ 여덟 글자를 적어 보내 주셨어요. 중국, 남한, 북한, 유적(流謫)과 표박의 일흔 해를 일관된 사랑과 열정으로 버틴 삶과 이데올로기, 그 위에 거대한 학문의 세계가 영글었습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쇠발로 반석을 다지라.’ 어정쩡한 나이에 벌써 게으름 피우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이 경구를 정 작가께 선사하고 싶습니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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