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에 쓰이는 이름인고. 아줌마들의 관광버스 유람단? 어느 철없는 상인연합회? 비구니들이 사는 절 이름?
이 세 모임은 전부 한의사 이유명호씨(53)가 만든 여자들의 ‘사조직’이다.
‘십자매 관광단’과 ‘뽀뽀뽀 번영회’는 그가 호주제 폐지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여성운동에 발을 담근 뒤 알게 된 사람들과 만들었고, ‘우아사(우리는 아름다운 사람들)’는 그의 한의원 홈페이지(www.yakchobat.com)에 모여든 회원들이 합심해 만든 모임이다.
거창한 목적도, 별다른 관리도 없다. 그저 시간 날 때, ‘땡길 때’, 짐 챙겨 여자들끼리 훌쩍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이 모든 모임의 공통점이다.
사람 몰고 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는 그는 ‘한의학계의 구성애’라 불릴 정도로 성, 여성의 몸에 대한 거침없는 입심으로도 유명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책 ‘살에게 말을 걸어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 등도 잇따라 펴냈다.
‘왕언니’ ‘꽃가라’ ‘깻빡’ 등 다채로운 별명으로 불리는 그를 만나 요즘 붐이 이는 여자의 여행, 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십자매 관광단’은 사이가 좋아서 한 마리가 아프면 나머지가 지극정성을 다해 살려낸다는 납부리샛과의 십자매를 본떠 그가 작명한 것.
가입하는 절차나 정례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메일을 돌려 대충 10여명이 모이면 1박2일로 소금강에 다녀오는 등 주말여행을 떠난다. 회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임이 거듭되면서 단골 멤버들이 생겨났다. 오지여행가이자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 여성학자 오한숙희, 전 시사저널 편집장 서명숙, 사회단체 집회 단골진행자 최광기, 이프토피아 대표 박옥희, 김혜련 우먼타임스 이사 등이 그들.
여자들끼리 가서 뭐하느냐고 묻자 그는 긴급구호가 필요한 세계의 현장에 목숨을 걸고 다니는 한비야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비야가 자신을 지켜주는 힘이 가족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젠 ‘언니들’도 자기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대. 사람에겐 칭찬과 무한한 격려가 필요해요. 자기가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에게 애정을 갖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시내버스만 타도 무작정 종점까지 가고 싶다”는 그는 자칭 “3대째 여행광”이다.
평생 집 밖에 나가본 적이 없던 그의 외할머니는 환갑을 앞두고 결심이라도 한 듯 동네에 여행계를 만들어 전국을 쏘다닌 “관광버스 여행단의 원조”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외할머니가 그의 다 쓴 공책 뒷장을 찢어 ‘광한루에서 점심’ 같은 식으로 여정을 꼼꼼히 기록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 73세인 그의 어머니는 43세에 남편을 여의고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30여년 전에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관악산 연주암에 올라가 사진을 찍을 정도로 극성”인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1주일에 두 번씩 산에 오른다. 오죽하면 ‘바람의 딸’ 한비야가 “바람의 할머니”라고 부를까.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중년을 훌쩍 넘은 나이에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호기심과 열정,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두 분이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여자가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가 아닐까.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길’ 위에서,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하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질 리 있겠는가.
○ 사랑은 피다
마포의 한의원에서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침을 놓으며 환자에게 해주는 말이 흘러나왔다.
“60점짜리 엄마만 하면 돼. 애들이 기본 40점은 자기 힘으로 해야 하는 거니까. 엄마가 80점, 90점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응?”
옆의 침술실로 들어간 뒤,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자기야, 이런 브라(와이어 브래지어) 좀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이 철심 좀 빼버려. 이게 얼마나 몸에 안 좋은 줄 알아?”
그에겐 상대를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는 재주가 있다. 야한 농담과 자신을 기꺼이 웃음거리의 소재로 삼는 유머로 남을 웃기고, 나무라는 목소리에도 정이 담뿍하다.
‘∼스트(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단 사람들을 거칠게 분류하면 두 부류가 있다. 분노에서 시작됐거나 아니면 사랑에서 출발했거나. 그는 후자다. 아들(20)이 “앞으로 TV 보고 울 때마다 500원씩 내라”고 할 정도로 눈물이 많다.
급진적 페미니스트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나는 사랑이 넘쳐서 말하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했다. “한의사로 일하면서 여자의 몸이 위대하다는 것을 절감했는데 여자들이 몸을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열등의식에 빠져 사는 걸 보고 안타까워 책을 쓰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
1주일에 1, 2회 전국 각지에 건강, 양성평등을 주제로 강의를 다니면서 그가 요즘 집중하는 것은 여자 몸과 행위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 그에 따르면 ‘폐경(閉經)’이 아니라 ‘완경(完經)’이며, 여자에겐 ‘오장육부’가 아니라 자궁까지 포함해 ‘육장육부’다. ‘유산’도 ‘출산’이며, 섹스는 남성의 ‘삽입섹스’가 아니라 여성이 결정하는 ‘흡입섹스’다.
호주제 폐지운동에 뛰어든 이유도 ‘사랑은 피’라는 생각에서다.
여자가 생리로 평생 흘리는 피는 40L. 한 사람 몸속의 피가 5L이니 8인분 양이다. 자연분만을 할 때는 500cc, 제왕절개를 할 때는 1L의 피를 흘리고, 임신을 하면 하루에 반 드럼쯤의 피가 태아에게 몰린다. 젖도 젖샘 아래 혈관에서 영양을 받아야 분비가 가능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이를 피로 낳고 기른 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의 표현 아닌가요? 그런데 왜 아이가 나오기만 하면 세상은 아버지의 성을 쓰라고 강요하는지…. 어머니가 피로 보여준 사랑의 본성을 성(姓)과 일상 속에서도 되살려야 해요.”
이쯤 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사랑주의자’라 할 만하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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