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실시된 미국 대통령 선거를 결정지은, 그리고 앞으로 첨예한 ‘가치 전쟁’이 예상되는 미국 사회의 최첨단 이슈들이다.
지금까지 미국사회는 개방의 폭을 넓혀가며 다양한 가치의 공존을 인정하는 쪽으로 움직여왔지만, ‘도덕적 가치’의 수호를 자임한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면서 이 다양한 가치들의 공존도 위기에 처했다.
기독교에서 ‘악’으로 치부되는 이 이슈들은 모두 사회에서 소수인 사람들의 권익과 연관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에서도 맞닥뜨리게 될 문제일는지도 모른다. 대선 이후 미국의 ‘도덕적 가치’는 어떻게 됐을까. 그들의 ‘가치 전쟁’을 들여다봤다.
○ 낙태 불법화
지난달 20일 미국의 내년도 종합세출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때 낙태와 관련된 조항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법안에 삽입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일대 소동이 일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문제의 조항은 연방정부의 기금 지원을 받는 병원과 공공의료보험기관에서 의사가 낙태수술, 낙태와 관련한 정보 제공을 거절할 권리를 인정한 것. 1973년부터 낙태가 합법인 미국에선 공공기금을 받는 병원이 낙태를 거절하면 불법이다. 개업의에 한해 가톨릭 신자처럼 양심의 자유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예외를 인정해왔다.
이를 두고 하원 소수그룹의 리더인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교묘한 기습공격”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어쨌든 대선 이후에 벌어진 최초의 ‘가치 전쟁’에서는 낙태 반대론자들이 작은 승리를 거둔 셈이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낙태 반대론자들은 지난해부터 부분출산 낙태금지법을 제정하면 법원이 위헌이라고 뒤엎는 등 번번이 열세를 면치 못했다.
낙태를 둘러싼 ‘전투’는 내년에 더 치열해질 듯하다. 반대론자들이 내년 의회에서 통과시키려고 준비 중인 법안 중에는 미성년자들이 낙태를 하기 위해 다른 주로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안, 낙태수술 도중 태아가 느낄 고통에 대해 의사가 환자들에게 설명하도록 요구하는 조치 등도 포함돼 있다.
○ 동성애자 결혼
부시 대통령이 재선된 직후인 지난달 초, 칼 로브 백악관 수석 정치고문은 TV에서 “품위 있는 사회를 위해 동성결혼 금지는 필수”라면서 본격적인 칼을 빼들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동성의 결혼은 낙태 문제 못지않게 기독교 단체가 금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2003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의 성행위를 처벌하는 텍사스주의 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한 뒤 매사추세츠 주에서도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등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어 왔지만, 지난달 대선을 계기로 대대적 반격이 시작됐다. 11개 주가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주 헌법 개정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해 모두 통과된 것. 내년엔 동성의 결혼을 금지하는 조항을 연방헌법에 명시하려는 개헌 움직임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계를 되돌리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듯하다.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하긴 했어도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선에는 모자란다. 또 전체 50개 주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38개 주의 의회가 동의해야 개헌이 가능한데, 현재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명시적 조항을 갖고 있는 주는 모두 35개. 3개만 늘리면 될 것 같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예컨대 양성 평등권에 대한 수정 조항은 1923년에 처음 의회에 상정돼 의회를 통과하기까지 50년이 걸렸으나 여전히 38개 주의 동의 확보에 실패해 실현이 좌절됐다.
미국 헌법 200년의 역사에서 개인의 인권을 규정한 10개조의 권리선언을 제외하고 모두 17차례의 수정이 이뤄져왔는데 이는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 보장 등 주로 권한의 ‘확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만약 동성 결혼 금지처럼 권한의 ‘규제’를 수정헌법에 담으려 시도할 경우 만만치 않은 반발을 직면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또 ABC 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연방헌법 수정을 통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데 찬성한 사람은 38%였다. 그보다 많은 58%는 ‘그 문제는 주 단위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응답했다.
○줄기세포 연구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해서는, 부시가 재선되던 날이 되레 부시에 맞서는 쪽이 승리를 거둔 날이기도 하다. 지난달 2일 캘리포니아 주에서 진행된 주민투표에서는 30억 달러 (약 3조1000억원)에 이르는 줄기세포 연구기금 안이 통과됐다. 이는 미국 역사상 주 차원에서 집행되는 최대 규모의 연구 프로젝트다.
3년 전 부시 대통령이 연방정부의 지원을 대폭 삭감해버린 줄기세포 연구도 지난달 대선에서 ‘도덕적 가치’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기독교계로부터는 생명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레이건 전 대통령의 미망인 낸시 여사와, 대선 직전에 사망한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는 불치병 치료의 영역에서 줄기세포 연구의 필요성을 줄곧 제기해왔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줄기세포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비난도 만만치 않다. 벤처 캐피탈리스트와 부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통과된 이 프로젝트는 막대한 금액 때문에 ‘21세기의 골드러시’라고 불릴 정도다. 줄기세포 연구가 ‘섹시한’ 분야로 부상되는 바람에 연구의 결과가 공공에게 이로운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난도 받는다.
공화당은 인간배아를 이용한 연구 자체를 금지하는 연방차원의 법률 제정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과학계에서는 이미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의 시동이 걸린 마당에 줄기세포 연구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접근방식은 사라지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감이 높아가는 추세다.
○ 안락사 합법화
지난달 대선 직후 부시 행정부는 존 애슈크로프트 전 법무장관이 오레곤 주의 안락사 허용이 연방헌법에 위배된다면서 대법원에 제기한 청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안락사를 허용하는 주는 오리건 주 한 곳뿐이다. 그러나 하와이, 버몬트 주에서도 안락사 법을 만들자는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고,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어, 더 이상 확산되기 이전에 뿌리를 뽑자는 심산인 듯하다.
97년 ‘품위있게 죽을 권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오리건 주에서는 지금까지 180여명의 말기암 환자들이 의사의 처방을 받아 구입한 약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락사와 관련한 의사의 처방을 받으려면 살날이 6개월 미만인 불치병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며 2명 이상의 의사에게서 진단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단계의 입증 단계를 거쳐야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애슈크로프트가 이 법을 없애달라고 청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이전에도 연방지법과 연방순회항소법원에 2번이나 청원을 냈지만 모두 기각됐다. 주 차원의 의학적 규제에 그가 간섭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번엔 부시 행정부가 지지하고 나서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대법원은 이 문제에 대해 내년 초 입장을 표명하게 될 듯하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