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나뭇가지에 연두색 잎이 뾰족뾰족 돋으려면 먼저 혹한의 겨울을 견뎌야 하겠지요. 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처럼 말이에요. ‘나무는 지가 몸으로/나무이다’로 시작하는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의 낡은 겉표지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봅니다. 선생님, 이것은 제가 생애 최초로 구입한 시집이에요. 1985년 그해, 시집 한 권에 1500원이었고, 저는 막 첫사랑(!)을 시작한 열네 살짜리 소녀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서 답장을 받지 못해 절망하셨다는 선생님의 일화를 들으며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보다 약 25년쯤 늦게 중학시절을 맞이한 저도 그 나이 무렵 거의 유사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제 첫 ‘러브레터’의 대상은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던 한 대학 농구선수였답니다. 막 개통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실 실내체육관을 찾아가 응원하던 일, 학교 앞 문방구에 걸린 그의 브로마이드를 ‘코팅’해 책상서랍 깊숙이 간직하던 일들이 떠오르네요. ‘오빠!’로 시작하는 제 첫 연애편지는 불행히도 채 부쳐지기도 전에 어머니의 검열에 걸려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고 말았답니다.
민망하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스타플레이어의 어떤 점이 당시의 저를 그렇게 매혹시켰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어쩌면 저는 그 동경의 대상을 정말로 좋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좋아한다는 스스로의 감정 자체를 즐겼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첫사랑의 비밀스러운 속성은, 누군가를 연모하는 행위를 통해 ‘나’의 내면을 발견하고 자아를 확인하는 데 있는 건 아닐는지요. 이 땅의 교육현실에 짓눌린 열네 살 소녀에게 이런 ‘연애’의 발견은 진짜 ‘나’를 찾고 싶다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고요.
1920년대 초반 조선의 연애 열풍을 분석한 권보드래의 책 ‘연애의 시대’에 의하면,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연애편지’를 통한 열정적인 내면의 토로가 큰 유행이었다고 해요. 우편제도의 발달이 이성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연애편지의 역사는 곧 이 땅의 근대적 사랑의 역사와 맞물리는 셈입니다.
가장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사랑조차 실은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이 새삼스러워요. 선생님 말씀대로 이광수의 ‘무정’이 근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한 이래, 한국인들은 여러 단계의 새로운 근대를 체험해 왔지요. 또한 ‘연애’를 둘러싼 사회적 가치와 행동 양식도 크게 변했습니다. 21세기, 이제 사람들은 연애에 관하여 보다 밝고 경쾌한 어법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연애에 목숨을 걸었던 시대’는 이미 훌쩍 지나버린 걸까요? 일정하게 유형화된 근대적 사랑의 각본은, 그저 낭만적인 판타지에 불과할 뿐일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어딘가에는 생애 첫 번째 ‘연애의 대상’을 만나 가슴앓이 중인 ‘열네 살짜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일 거예요.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 싶습니다. 겨울나무가 봄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 견뎌야 하는 고통의 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도 곧 알게 되겠지요?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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