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여적(餘滴·쓰고 남은 먹물로 쓴 글이란 뜻)’이라고 부르는 수필 모음집. 가슴 아픈 개인사에 대한 내밀한 고백과 한국역사에 대한 통찰이 함께 담겼다.
무엇보다 서두에 펼쳐지는 저자의 남다른 개인사가 가슴 뭉클하다. 1942년생인 저자는 강원 춘천시의 유복한 집안에서 네 딸의 장녀로 태어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다. 그러나 6·25전쟁은 그 기억을 참혹한 악몽으로 바꿔 놓았다. 피란길에 절망한 아버지는 어린 세 동생을 안고 그가 보는 앞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혹독한 공습과 빨치산의 총탄 세례를 뚫고 살아난 그는 “그 뒤 어떤 전쟁영화를 보아도 실감하지도, 감동하지도 못 한다”고 털어놓는다.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결혼 후 두 아들을 낳고 뒤늦게 만학(晩學)의 길에 뛰어든 그는 소녀시절부터 동경하던 문학 대신 역사를 택하고, 여기서 얻는 지혜를 대중과 나누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를 지녔던 선비정신, 거울처럼 말갛게 비치면서도 1000년이 갈 정도로 질긴 명경지에 담긴 장인정신, 그리고 가족사의 비극을 딛고 조선시대가 꿈꿨던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했던 정조의 통치철학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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