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 입력 2004년 12월 3일 16시 58분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고 민병갈씨.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고 민병갈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임준수 지음 류기성 사진/208쪽·1만7900원·김영사

이 책은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의 고전적인 작품 ‘나무를 심은 사람’보다 더 소중한가? 단연코 그렇다. 최소한 한국사람들에게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전란으로 피폐해진 알프스의 산자락을 녹화한 한 양치기 노인을 다룬 감동적 허구라면, 이 책은 박토의 한국 땅 18만 평을 나무의 낙원으로 만든 한 미국인의 실화이기 때문이다.

그는 1945년 여름 한국을 처음 찾아왔던 미국 해병 중위 칼 밀러 씨(1921∼2002). 1979년 미국인으로는 처음 한국에 귀화해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생을 살았다. 이 책은 2002년 4월 그가 “미국에서 치료 받으라”는 혈육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주민등록 주소지인 충남 태안군의 한 작은 병원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이곳 ‘천리포 수목원’을 어떻게 일궈나갔는지를 써 내려갔다. 담백하고 아름다운 글을 읽어 가다 보면 연고 없는 곳의 자연과 인간들을 사랑한 푸른 눈의 고결한 인류애가 가슴을 친다.

북한산의 풍광에 반한 밀러 씨는 1950년 겨울 금강산까지 보고 싶어 노획한 북한군 차량을 타고, 후퇴하는 유엔군 행렬을 거슬러 올라가다 제지당했을 정도로 한국의 산하를 사랑했다. 그는 6·25전쟁 종전 후 어렵사리 한국은행에 말단직을 얻어 평생 한국의 금융기관들에서 일했다. 증권에서 타고난 승부감각을 발휘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천리포 수목원 본원의 ‘큰 연못’. 민병갈은 1970년 척박한 이 일대에 수목원을 조성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이 인공연못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사진 제공 김영사

그는 1962년 딸의 혼수비용을 걱정하는 한 노인을 돕기 위해 천리포의 땅 6000평을 구입했다. 물이 없어 척박했지만 그는 어느 결엔가 여기에 수목원을 세울 꿈을 꾸게 됐다. 그는 1970년 나무를 심기 위해 첫 삽을 뜬 뒤, 일주일에 나흘은 서울에서 일하고 사흘은 천리포로 내려갔다.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연못을 파고, 야간에도 횃불을 밝힌 채 나무를 심고, 땅을 꾸준히 사들였다. 그를 줄곧 도왔던 국내 식물학의 대가 이창복 씨(2003년 타계)는 “내가 쓴 식물도감을 그가 얼마나 많이 봤는지 너덜너덜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 덕분에 천리포 수목원은 1만300여 종의 나무를 품게 됐으며, 세계수목협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 받기도 했다. 이런 결실을 보게 된 데는 독신으로 산 그의 자유스러움 외에도 뛰어난 국제 감각이 도움이 됐다. 그는 냉전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도 ‘중공’과 북한으로부터 사실상 밀수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무를 들여왔다. 그는 미국의 희귀 나무 경매에도 뛰어들어 미국인 라이벌 켄 틸트 씨를 늘 따돌리곤 했다. 틸트 씨는 2002년 민 씨가 쓰러지자 위로차 한국을 찾아왔다가 천리포수목원을 보고 돌아간 뒤 민 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수목원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경매에서 매번 졌던 게 나무들에겐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지요.”

민 씨는 아침마다 나무들한테 인사했다. 라스베리펀이라는 목련을 어머니(1996년 타계)처럼 여겨 “굿모닝, 맘”이라고 속삭이곤 했다. 고국에 남겨둔 어머니에게 늘 송구스러워했던 그가 숨지자 라스베리펀은 이듬해 슬픔 때문인지 꽃을 피우지 않았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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