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당신의 감성좌표 브랜드가 말한다

  • 입력 2004년 12월 9일 16시 16분


서울 강남구 청담동 미시건&인디애나치과 심영석 원장(41·왼쪽)과 영화음악 작곡가 이동준 씨(37·오른쪽). 두 사람의 겉모습과 라이프스타일은 아주 대조적이다.

심 원장은 첫눈에도 깔끔하고 포멀한 전문직 스타일이었다.

그는 ‘오스틴 리드’의 짙은 감색 투 버튼 스트라이프 슈트 안에 닥스 와이셔츠, 불가리 넥타이, 듀퐁 커프스 버튼을 매치했다.

안경테는 프라다, 벨트와 구두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좋아하는 음료수는 해태 실론티, 영화는 ‘공동경비구역JSA’를 꼽았다.

고상하고 진지한 그의 이미지에 맞는 음료수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병원에서 가까운 갤러리아 백화점을 이용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역사가 오래됐으면서 디자인이 크게 튀지 않고 은근한 멋이 있다”는 생각 때문. 구치만 해도 지나치게 트렌드에 민감한 것 같아 부담스럽다.

반면 이 씨의 외모에서는 개성과 크리에이티브가 강하게 드러난다.

기자가 갑작스럽게 방문한 날, 그가 입고 있던 옷은 검은색 헬무트 랭 니트와 콤 데 가르송 브랜드의 검은색 바지. 바지는 마치 튤립 모양의 치마처럼 생겼다.

심 원장과는 달리 그는 ‘유쾌한 파격’을 즐긴다. 패션 리더들이 좋아하는 고급 브랜드를 많이 갖고 있지만 일반인은 그의 파격을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다.

해외 출장길에 쇼핑한다는 그의 수납장을 열어보니 돌체 앤 가바나 슬리퍼, 폴 스미스 남방, 알랭 미끌리 안경이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장난감 총들도 나왔다. 즐기는 음료수는 제주감귤, 좋아하는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 역시 실험성과 파격이 엿보였다.

40세 전후, 주요 생활무대는 서울 청담동. 직업만 다를 뿐 대개 비슷할 것 같은 두 사람이 소비하는 브랜드들은 왜 다를까. 각자 어떤 감성적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두 사람의 감성 분석을 통해 당신의 감성은 ‘보수’와 ‘혁신’, ‘젊음’과 ‘노련함’ 중 어디에 위치하는지 찾아가 보자.

○ 브랜드→감성→라이프스타일

사람이 물건을 구입할 때 100% 이성적인 면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감성적인 면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성능이나 용도를 따지는 것은 이성, 디자인이나 느낌을 따지는 것은 감성적인 면이다.

옷, 가방, 신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제품들의 이미지가 어딘가 비슷한 것은 감성적인 면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제품과 브랜드 중 자신을 연출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골라내는데 이런 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이 감성이다.

감성의 차이는 라이프스타일의 차이로 이어진다.

심 원장은 쌍용의 체어맨을 탄다. 튀지 않으면서 품격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난초를 기르는 게 취미다. 술집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는 주로 발렌타인 위스키와 헤네시 코냑을 마시고 시가를 피운다.

이에 비해 이 씨의 승용차는 자주색 BMW 3시리즈. 흔치 않은 자주색이 마음에 들어 차를 보자마자 단번에 결정했다. 일본에서 구입한 향신료로 스스로 음식을 만들고 늘 음악 채널을 켜놓는다. 와인만큼이나 향과 맛이 다양한 일본 청주(사케)와 막걸리, 영화 ‘텐 미니츠 트럼펫’과 ‘피아니스트의 전설’,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집을 가까이 한다.

일본의 유명 감성 디자이너 사카이 나오키(坂井直樹·57) 씨가 개발한 ‘이모셔널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해봤다. 이 프로그램은 브랜드 이미지를 통해 개인의 성향이나 라이프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모셔널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감성 매트릭스’는 감성과 연령의 두 축으로 이뤄졌다. 왼쪽으로 갈수록 감성의 경향이 보수적이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혁신적이다. 연령은 실제 나이가 아니라 정신 연령인데 위로 갈수록 나이가 많은 것이다.

사카이 씨는 30년 전 이모셔널 프로그램을 개발한 후 수천 명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브랜드와 감성, 라이프스타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끌어냈고 심리학에서 사람의 성격을 몇 가지 패턴으로 유형화하는 것처럼 소비자의 감성 스타일을 9가지로 분류했다. (오른쪽 표 참조).

이에 따르면 심 원장은 정통파, 이 씨는 표현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브랜드 수용의 역사

유럽에선 1700년대에 이미 신문을 통해 광고가 시작됐을 정도로 브랜드의 역사가 오래됐다. 소비자들은 몇 백 년 전부터 브랜드의 감성적인 측면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에 해외 명품 브랜드가 정식으로 수입된 것은 이제 불과 10년이다. 샤넬만 해도 이름이 알려지기는 수십 년 전이지만 국내에 정식으로 의류와 잡화가 들어온 것은 1997년. 그동안 한국 시장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70년대까지 브랜드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었다. 오직 제품이 있느냐 없느냐, 즉 소유 여부가 소비 행위의 전부였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집에 냉장고와 TV, 전화기 같은 것이 있는지 물었던 가정생활 조사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제품의 선택 기준은 오직 기능이었다.

1980년대 초반 일부 해외 브랜드가 국내에 상륙했다. 수입 운동화인 나이키는 국산인 페가수스와 극명하게 달랐다. 다만 그 차이는 ‘나이키=비싼 고급 신발’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수준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1990년대 한국에선 말 그대로 브랜드 붐이 일었다. 명품의 복제품을 뜻하는 ‘짝퉁’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특정한 브랜드에 대한 소유욕은 아니었다. 어떤 브랜드건 상관없었다. 명품 핸드백 가운데 하나만 들면 트렌드 세터 대접을 받았고 간치니(말발굽) 로고가 있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구두만 신어도 ‘명품족’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상황이 바뀌고 있다. 한때 해외 명품 브랜드 안에서도 가장 많이 팔리는 가방이 ‘잇 백(it-bag)’으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지만 요즘엔 오히려 기피의 대상이다.

디자이너 지춘희 씨는 “누구나 알아보는 브랜드에 식상한 요즘 트렌드 리더 층은 오히려 그 옛날의 맞춤 패션에 눈을 돌린다. 디자이너를 개별적으로 찾아와 단 하나 뿐인 옷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일기획 박재항 국장은 “2004년은 ‘개별 브랜드가 갖는 상징적 가치가 자신에게 맞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진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심 원장이나 이 씨처럼 살바토레 페레가모가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고민하는 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 2004 한국

한국 자동차시장에서 ‘수입 자동차=부(富)의 상징’이라는 단순한 등식 또한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수입차 소비는 고객의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더 잘게 쪼개지고 있다. 이를 테면 ‘벤츠-성북동-신세계백화점’, ‘BMW-청담동-현대백화점’, ‘렉서스-분당-롯데백화점’ 하는 식으로 이미지가 연결되는 것이다. 또 아우디는 숨은 듯 튀고 싶은 사람이, 폴크스바겐은 실용적인 사람이, 사브는 자유로운 이미지의 사람이 주로 타는 차로 인식된다.

패션 쪽도 마찬가지다.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 숙녀1팀 바이어 우희원 씨는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청담동 며느리 패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청담동 며느리 패션’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풍의 깔끔한 슈트, 간치니 로고가 있는 3cm 굽의 페라가모 슈즈, 루이비통 핸드백 등의 단정한 스타일. 너도나도 교복처럼 비슷하게 입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신세계 인터내셔널의 신지연 씨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연예인, 해외 유학생, 재벌가 딸들은 예전의 판에 박힌 ‘청담동 며느리 패션’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성적 특징을 최대한 부각시킬 수 있는 브랜드를 골라 입는다”고 말한다. 또 꼭 값비싼 명품이 아니더라도 자기 스타일에 맞는 아이템이면 과감하게 매치하는 실험정신도 돋보인다.

과거 무조건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분류됐던 소비층이 이제는 세분화된 감성위치에서 각각의 세력을 뚜렷하게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어색한 모습도 연출된다.

BMW코리아 김영은 상무는 “한국 수입차 소비자는 적당한 타협이 없이 무조건 고급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에선 천으로 된 시트와 수동 손잡이를 달더라도 동력 성능은 최고를 추구하는 소비자도 많지만 한국에선 차의 크기나 성능과 상관없이 무조건 가죽시트에 최고급 사양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사카이 씨는 “모든 소비자나 브랜드가 각각의 가치를 갖고 있다”며 “기업이나 상품은 그 차이를 보고 독창성 경쟁을 벌이고 소비자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발견해 일관성을 갖고 브랜드를 선택할 때 생활문화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글=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

그래픽=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정장브랜드 선호도 男-아르마니 女-타임 1위▼

한국 소비자가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는 어떤 것일까.

패션정보회사 퍼스트뷰코리아가 10월 명동, 종로, 신촌, 강남역, 압구정, 홍익대 앞 등 서울 시내 주요 상권에서 남녀 소비자 1200명(13∼59세)을 상대로 조사한 ‘남녀 소비자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남성 정장 브랜드는 아르마니(10.0%), 여성 정장 브랜드는 타임(8.2%)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캐주얼 브랜드는 폴로(9.2%), 여성 캐주얼 브랜드는 빈폴(6.3%)이었다.

전체적인 추세는 고급 수입 브랜드와 국내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해외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

아르마니는 이전 조사(올해 3월 4.6%)보다 무려 두 배 이상 늘었다. 정장, 캐주얼 상관없이 이미지가 좋은 브랜드 상위 10위권 중 빈폴과 타임만이 국내 브랜드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해외 수입 브랜드였다.

응답자들은 각 브랜드 이미지에 대해 △보스=지적이고 단정함 △비비안 웨스트우드=도발적인 디자인 △샤넬=새로운 콘셉트가 자주 등장 △아르마니=중후한 멋과 고품격 △폴스미스=젊음 △랄프로렌=편안하고 세련됨 △마크 제이콥스=디자인이 예쁨 △폴로=개성 있고 편안함 △구찌=트렌디를 선도하는 디자인 등을 꼽았다.

퍼스트뷰코리아 이정민 이사는 “과거와 달리 요즘 소비자들은 적극적으로 패션 정보를 탐색해 스스로 브랜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또 온라인 쇼핑과 해외 아울렛 이용 등을 통해 해외 수입 브랜드를 국내 브랜드처럼 친숙하게 느낀다는 설명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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