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28>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9일 18시 0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역상과 근흡 장군은 본진으로 돌아가 대왕의 어가(御駕)를 호위하라 이르라. 그리고 남은 제후군 장수들에게는 힘을 다해 북문을 지키되, 정히 뜻과 같지 못하면 동문으로 빠져나가 사수(泗水)와 곡수(穀水)를 바라고 물러나라고 전하라. 그리로 가다 보면 전날 하비(下비) 하상(下相)까지 밀고 들어갔다 되돌아오는 여러 갈래의 제후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합치면 다시 10만 대군은 이룰 수 있을 터, 그 세력으로 방심하고 뒤쫓아오는 적을 되받아치면 서쪽으로 빠져나올 길도 단숨에 열 수 있다.”

한신 나름으로는 꼼꼼히 헤아려 만일에 대비한 것이지만 팽성의 붕괴는 그 길로 시작되었다. 한군이 팽성을 버리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한군이 뭔가에 쫓기고 내몰리는 듯한 분위기가 먼저 서문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다가 한신이 보낸 전갈에 따라 한왕이 하후영의 수레에 오르고, 저희끼리만 남게 된 북문 쪽의 제후군이 술렁거리게 되면서, 그때껏 눈치만 보던 성안 백성들도 달라져갔다. 불온한 눈짓과 수군거림이 오가고 대여섯씩 떼 지어 성문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오래지 않아 한왕과 그 측근들이 한 갈래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남문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재빨리 팽성 안을 돌았다. 그리고 그때를 시작으로 성벽 위에 남은 한군의 전의(戰意)는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시들어갔다. 어슬렁거리는 백성들은 한층 불온한 침묵으로 까닭 모르게 허둥대는 한군을 엿보았다.

그런 성안 공기는 성 밖에서 전기(戰機)가 무르익기를 노리고 있는 패왕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두 번째 공세 뒤에 환초가 다시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북문 쪽에 이르렀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패왕은 잠시 공성(攻城)을 미루고 가만히 성안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 소식이 성벽 위에 있는 한군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들의 갑작스러운 조용함이나 느리고 풀죽은 움직임에는 어딘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안간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문으로 한 떼의 인마가 빠져나갔다는 말을 듣자 패왕은 드디어 한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음을 알아차렸다. 시각도 마침 신시(申時)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이다! 매섭게 성을 들이쳐라. 이번에는 반드시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넘어야 한다.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는 공을 종리매와 환초에게 넘겨주지 마라!”

패왕이 그렇게 용저와 항타를 충동질하며 스스로 앞장서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따라 골라 뽑은 3만의 초나라 군사들이 어느 때보다 사나운 기세로 짓쳐들었다. 곧 구름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지고 갈고리 달린 밧줄이 성벽 위로 던져졌다.

그런데 실로 알 수 없는 것은 한군이었다. 어떤 일에든 꺼지기 전에 한번 타오르는 불꽃이 있는 법인데 그날 팽성을 지키는 한군에게는 그마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모질게 버티던 기세는 어디가고, 초나라 군사들이 성벽에 붙기도 전에 저마다 성벽을 기어 내려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적에게 달아날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패왕이 성벽 위로 올라간 초나라 군사들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나 정작 문을 열어준 것은 초나라 군사들이 아니었다. 패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문을 열고 나온 것은 진작부터 부근을 어슬렁거리며 틈을 엿보던 성안 백성들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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