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39>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22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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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 항우가 다시 장수들을 불러 모아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일러준 것은 영벽(靈壁) 동쪽 한군(漢軍)의 진채 앞에 이른 뒤였다. 가까운 언덕에 올라 한 차례 한신이 펼쳐둔 진세를 살피고 난 패왕은 먼저 한 떼의 말 탄 기수(旗手)들부터 불러놓고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여기 용봉기(龍鳳旗)들은 기폭이 넉 자에 깃대가 열 자인데다 금실로 수놓아 멀리서도 잘 보일 것이다. 게다가 기수들은 모두 키가 크고 팔 힘이 좋은 자들로, 준마에 올라 언제나 과인과 함께 움직일 것이니 저 금빛 용봉기가 펄럭이는 곳이 곧 과인이 있는 곳이다. 그대들은 이제 적이 우리를 꾀어 들인답시고 열어준 적진 안으로 과인과 더불어 뛰어든다. 그런 다음 각기 이끄는 군마와 더불어 이곳저곳을 닥치는 대로 찔러가며 한왕 유방을 찾되, 언제든 힘이 부치면 이 깃발 주변으로 돌아오라. 하지만 유방이 있는 곳을 찾으면 곧 과인에게 알려 우리의 전력을 그리로 집중할 수 있도록 하라. 유방만 사로잡으면 남은 한군은 머리 없는 뱀이나 다름없다. 20만이 아니라 100만이라도 모두 수수(휴水)에 쓸어 넣어버릴 수 있다.”

그런 다음 투구와 갑주를 여미더니 스스로 앞장서 군사를 몰아갔다. 한 자루 긴 철극(鐵戟)을 끼고 오추마를 박차 달려가는 패왕의 모습은 천마(天馬)를 타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장(神將) 같은 데가 있었다. 금빛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뒤따르는 여남은 명의 기수들도 그런 패왕의 위용을 더해주었다.

스스로 전군(前軍)을 이끌고 진문 앞에 나와서 있던 한신이 왕릉에게 가만히 일렀다.

“패왕은 이번에도 틀림없이 기세로 밀어붙일 것이오. 장군께서는 패왕을 맞아 싸우시되 반드시 이길 필요는 없소. 한번 창칼을 맞대 우리 한군에게도 장수가 있음을 보여주고는 바로 진채 안으로 달아나시오. 그 다음은 좌군(左軍)이 맡을 것이오. 장군은 진채 안에서 군사를 정비한 뒤 우리 유군(遊軍)과 별동대 사이에 끼어 좌군과 우군을 모두 뚫고 들어온 패왕을 다시 맞으면 되오. 아무리 패왕이라도 배가 넘는 군사와 여러 장군들이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며 들이치면 끝내 배겨내지는 못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반드시 대장군의 군령을 부끄럽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릉이 그러면서 한신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말배를 찼다. 패왕 항우를 알아볼 때부터 왕릉의 두 눈은 금방 피라도 쏟을 듯 시뻘겠다. 이미 한왕을 섬기기로 한 자신을 패왕이 억지로 불러들이려 하다가 늙은 어머니를 죽게 한 일 때문이었다. 한신이 그런 왕릉의 등 뒤에 대고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 한 가지, 장군께서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큰일을 그르쳐서는 아니 되오. 부모를 죽인 원수와 한 하늘을 일 수 없다지만, 장부에게 그보다 더 큰 것은 천하를 위한 충의요. 열 합(合)을 넘기지 말고 물러나 패왕을 우리 진채 깊숙이 끌어들여야 하오!”

하지만 한신이 왕릉을 가장 먼저 패왕과 맞서게 한 것은 바로 그 사사로운 원한의 힘을 빌리기 위함이었다. 맹렬한 불덩이처럼 내달아오는 패왕의 엄청난 첫 기세를 맞받아 칠 수 있는 것은 왕릉의 뼈에 사무친 복수감 밖에 없었다. 번쾌와 관영, 조참, 주발 같은 한군(漢軍)의 맹장, 특히 패현(沛縣) 출신의 용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그 싸움에 쓸 수 없게 된 탓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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