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41>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24일 17시 44분


“너희들은 사마흔과 동예가 아니냐? 둘 모두 죽을 목숨을 살려 왕위에까지 앉혔는데 어찌 이리 배은망덕할 수 있느냐? 어서 말에서 내려 무릎 꿇고 죄를 빌지 못할까?”

패왕 항우가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로 그렇게 꾸짖자 둘은 창칼을 맞대 보기도 전에 말머리를 돌려 진채 안으로 달아났다. 장수가 그러한데 군사들이 나서 싸울 리 없었다. 마찬가지로 맞서는 시늉도 안 해보고 뒤돌아서 달아났다.

원래 한나라 우군(右軍)이 맡은 것은 잠시 패왕의 선봉을 막아, 앞서 진채로 돌아간 좌군(左軍)이 대오를 수습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자기들도 진채 안으로 물러나 뒤따라 온 초군(楚軍)을 얽을 거대한 포위망의 한 귀퉁이가 되어야 했는데,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가 이끄는 우군은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앞뒤 없이 진채 안으로 쫓겨 들어가 한왕 신의 좌군까지 흔들리게 했다.

새왕과 적왕이 끌어 주어야 할 시간을 끌어 주지 못하자 당장 다음이 문제였다. 우군에 이어 패왕의 길을 막고 기운을 빼줄 일을 맡은 주설(周설)과 장창(張蒼)의 별대(別隊)가 얼결에 달려나가 패왕 앞을 가로막았으나 어림없었다. 앞선 부장(部將) 하나가 패왕의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지자 바로 밀렸다.

대장군 한신이 다시 전군(前軍)을 들어 그런 패왕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초군의 주력이 한군 진채 깊숙이 뛰어들어 있었다. 이제 한군은 땜질하듯 패왕의 앞만 가로막을 때가 아니었다. 정교하게 짜인 20만 군세가 수레바퀴 돌아가듯 차례로 치고 빠지며 그물 속으로 뛰어든 초나라 군사들을 들부수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반격의 계기를 만들어야 할 좌군과 우군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별대까지 맥없이 무너지자 한신이 쳐둔 그물망은 조금씩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그때쯤은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냉철하게 싸움의 흐름을 살피며 변화에 대처해야 할 자신의 전군(前軍)까지 임시방편으로 패왕 앞에 내던져지고 있었다.

(좋지 않다. 무언가 어그러지고 빗나가는 데가 있다.)

대장군 한신은 갑작스러운 실패의 예감으로 섬뜩해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장졸들을 북돋워 초나라 선봉의 기세를 꺾어 보려 애썼다.

“겁내지 말라.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이미 태반이 꺾여 우리가 쳐둔 그물 속으로 들어왔다. 모두 때려잡아 여기서 천하 형세를 결정짓자!”

그렇게 외치며 스스로 긴 칼을 빼들고 왕릉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초군과 마주쳐 나갔다.

한편 패왕 항우는 한나라 진세 깊숙이 파고들수록 그 두터운 군세와 정교한 짜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 이름을 떨치던 때의 장함(章邯)에게서조차 느껴 보지 못한 진영이요 그 배치였다.

(한신 이놈이 허우대만 멀쑥하고 입만 번지르르한 책상물림은 아니었구나. 오늘 자칫하면 거록(鉅鹿)에서보다 더 힘든 싸움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패왕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산악 같은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긴 철극을 휘둘러 앞을 막는 한군을 가르고 나아가며 뒤따라오는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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