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라통사’(주류성)를 펴낸 신형식 상명대 초빙교수는 신라사(1985년), 백제사(1992년), 고구려사(2003년)를 모두 펴낸 원로 사학자다. 20여 년간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지난해 정년퇴임해 상명대로 옮겨갔다.
신 교수는 특히 고구려사 연구를 위해 10여 년간 중국을 수없이 오가면서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의 실상을 꾸준히 국내에 알려 왔다. 또한 백산학회 회장으로서 간도 등 북방영토에 대해서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런 그가 새삼 ‘신라통사’를 펴낸 데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요하다고 해도 한국의 민족적 정통성을 지킨 신라가 외면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 몫을 했다.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의 고구려연구재단이 만들어졌고, 백제사 연구기관도 5곳이나 됩니다. 하지만 신라 연구소는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운영하는 한 곳뿐이지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바람에 영토가 줄었다는 반감이 은연중에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 교수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대내적으로 지도층이 멸사봉공을 솔선수범해 국민이 국가사업에 적극 참여하도록 한 공민화(公民化)를 삼국 중에 가장 먼저 이뤄냈고, 대외적으로는 동북아의 세력관계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절묘한 외교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에 비유하면서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가 당을 이용해 삼국을 통일했다’라고 역사기술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신라의 1000년 지속의 비결 중 하나가 경주라는 수도를 지키면서 이를 끊임없이 보완했기 때문이라는 독특한 주장도 펼쳤다.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가 중국과의 기세 싸움에서 밀렸고, 백제는 한성을 빼앗긴 뒤 공주-부여로 계속 천도하면서 쇠약해졌습니다. 반면 신라는 통일 이후에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5소경(小京)제도를 통해 수도의 기능을 분산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수도 이전보다는 그 기능을 분산하는 방안을 연구해야지요.”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