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교토 도시샤(同志社)대는 13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대다. 4일 이 대학에서는 제1회 재외 한인문학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 측에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 오양호 인천대 교수(국문학·정지용기념사업회 대표)가, 도시샤대에서는 하야시 다카시(철학), 사노 마사토(일본현대문학), 우지교 도이치 교수(대학 국제센터소장)가 참가했다. 정지용 윤동주 오상순 김말봉이 유학해 한국 문인들과도 인연이 깊은 이 대학에는 1995년 윤동주 시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 행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오 교수는 “200여 명의 일본인 학생들이 심포지엄 내내 몰려 성황을 이뤘다”며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韓流) 열풍이 문학을 통해 한국의 정신을 탐구해 보자는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학 측은 이날 3억 엔(약 30억 원)의 장학금을 출연해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을 지원키로 했으며 정지용 기념사업회가 제안한 정지용 시비와 동상도 세우기로 했다.
![]() |
오 교수는 “이 대학의 오타니 이노루 총장이 심포지엄 기념사에서 ‘한류가 불러온 한일간의 돈독한 관계를 이제 식민의 역사에서 자유로운 젊은 사람들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장학금 제도를 결심했다’고 밝힌 대목에서 모두들 감격했다”고 전했다.
한류는 이처럼 한국을 아시아의 문화중심국가로 위상을 높이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드라마, 영화, 가요 등 대중문화를 넘어 한국의 정신이 담긴 문학과 언어, 출판,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외국인과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능력시험 지원자가 세계적으로 1997년 2274명에서 올해 1만7531명으로 8배 늘었다. 국제교류재단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한국학 개설강좌는 90년 32개국 150개 대학에서 2004년 3월 기준으로 59개국 673개 대학으로 늘었다. 국제교류재단은 세계 각국의 한국학 학자들을 망라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내년에 첫 ‘한국학 백서’를 펴낼 계획이다.
특히 내년 독일에서는 한국문화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갈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2005년을 ‘한국의 해’로 선포했다. 1월 슈투트가르트 국제관광캐러반(CMT) 박람회에선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됐다. 한국관광공사와 경기도는 예술단 공연을 펼치고 한국 관광 상품을 집중 홍보할 계획이다.
함부르크 개항 816주년 기념 축제에는 부산시가 ‘코리아 페스티벌’을 열며, 5000t급 3척으로 구성된 한국 해군 순항함대가 함부르크 등 독일 항구 도시들을 순회하며 군악대 연주 퍼레이드를 펼친다.
베를린의 아시아 태평양 주간(9월)에는 한국의 전통 및 현대 무용 공연과 미술 작품 전시가 집중적으로 열린다. 독일 국립박물관에서도 고구려 고분전이 열리고 베를린 자유대와 공동으로 한국 중국 독일 학자들이 참여하는 고구려 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다.
‘한국의 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 주빈국 행사. 100여 개국 6600여 개 출판사가 참여하는 세계 최대 도서전인 이 행사는 ‘인문(人文) 올림픽’으로도 불린다. 전시장 내부에서 출판문화, 문학, 예술과 관련된 전시회를 비롯해 각종 토론회, 발표회, 소규모 공연이 열린다. 전시장 외부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센터, 문화센터, 도서관, 영화관 등에서도 한국의 문화 행사가 잇따라 펼쳐진다.
아울러 내년 4월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MIPTV(프로그램 견본시)’가 한류 드라마를 본격 선보일 예정이어서 한국 문화의 유럽 확산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해외에서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한류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1일부터 프랑스 파리의 사진전문화랑 ‘카메라 옵스쿠라’에서 ‘한국의 탈’ 시리즈로 사진전을 열고 있는 구본창 씨(51)는 유력 일간지 리베라시옹으로부터 “일본식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2∼6일 미국 마이애미비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는 한국 미술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국제화랑과 카이스갤러리가 참여했는데 특히 전광영 이불 최소영 함연주 씨의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휴스턴미술관이 2006년 자체 예산으로 한국관을 짓기로 한 것도 낭보. 이 미술관은 한국 작가들이 일본이나 중국 작가들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며 정기적으로 한국 작가들의 그룹전과 개인전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제갤러리 손성옥 큐레이터는 “최근 이스라엘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방한해 한국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볼 정도로 국제 예술계에서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이들과 이야기해보면, 외신에서 소개된 한류 열풍의 연장선상에서 한국문화 다시보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전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한류 세계화를 위한 제언
○이문열(소설가)=한국의 공산품 수출과정을 보더라도 신발과 의류에서 자동차 선박 전자제품으로 발전했다. 대중문화가 전위적으로 한류를 만들어놓으면, 한국의 전통 정신문화가 전파될 여지가 커진다. 일본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쇼몽(羅生門)’으로 해외에 일본 영화의 위력을 보인 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알려져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류의 움직임에 대해 서두르거나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이럴 경우 우리에게 허탈감을 주고 상대국에도 경계심을 안겨줄 수 있다. 국가가 주도해 한류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문화 예술인들이 한류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차분하게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윤기(소설가)=지난해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출간 조인식을 중국의 ‘작가 출판사’와 했다. 내가 읽어온 중국 고전들에 대한 빚을 갚는 느낌이 들었고, 이게 한류인 것 같다. 날렵한 대중문화만 해외로 나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가 이미지 차원에서 보완돼야 한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트렌드 물과 함께 한국 정신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나가야 한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드라마든 문학이든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국제성’과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류를 키우려면 우리가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세계와 어울리고 있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최정화(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 이사장·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교수)=한류는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국과 같은 문화권인 아시아와 달리 구미(歐美) 지역에 한류를 확산시키려면 합작 등 적극적 전략이 필요하다. 2002 한일월드컵은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잘 살리지 못했다. 한류도 월드컵 같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대중에게는 대중매체를 통해, 오피니언 리더들에겐 세미나 등 상호작용이 있는 자리를 통해 한류를 활용해야 한다.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한류가 업그레이드되려면 현지 문화와 언어에 밝은 연예인들이 나와야 한다. 그 나라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그 나라의 표현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기획 측면에서도 현지의 감성에 맞는 콘텐츠로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 장르의 드라마나 가요가 히트하니까 비슷한 유형의 작품들을 쏟아 붓는 식으로는 반짝 인기를 면하기 어렵다. 문화 예술계에서 진출 속도를 조절하고 진출 전략도 치밀하게 짜야 한다.
○강우석(영화감독)=한류는 외모가 뛰어난 한국 배우들에게 외국인들이 호감을 갖는 데서 시작된 듯하다. 단기적으로는 배우들의 호감도가 한류를 이끌고 있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보려면 그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짝 한류’로 끝날 수도 있다. 한류 열풍의 주인공들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일본 상영 때 그 배우가 누리는 인기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기도 했다. 외국 팬들이 갖고 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작품의 수준과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