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선택권]고교 ‘선지원 후추첨제’ 확대가 우선 대안

  • 입력 2005년 1월 3일 17시 37분


‘중학교 근거리 배정’을 요구하며 전교생의 절반 이상이 등교거부투쟁을 벌인 경기 안양시 생모루초등학교정문에는 ‘가까운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양=전영한기자
‘중학교 근거리 배정’을 요구하며 전교생의 절반 이상이 등교거부투쟁을 벌인 경기 안양시 생모루초등학교정문에는 ‘가까운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양=전영한기자
학부모와 학생이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를 선택할 수는 없을까.

고교평준화제도에서는 기본적으로 학교선택권이 없다. 특수목적고 등 일부 학교는 학생을 선발하고 있으나 학교 수가 적고 혜택 대상자도 적어 학교 선택권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교육전문가들은 특성화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많이 세우고 학교 선택권도 과감하게 확대하라는 대안을 제시하지만 교육당국은 미온적이다. 또 학교별 평가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 학교들이 잘 가르치기 위한 경쟁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원하는 학교 지원 기회 늘려야

초등학교는 근거리 배정을 원칙으로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중고교는 학생의 학업 능력이나 흥미 적성 등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교육이념과 교육과정, 교풍 등에 따라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릴 필요가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김흥주(金興柱) 연구위원은 “선진국은 대부분 근거리 학교 배정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상당수 국가에서 30%가량은 학교 선택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들 국가는 선호 학교는 학급 수를 늘리고 비선호 학교는 학급 수를 줄이는 정책도 병행하고 있다”며 “학교 선택권 확대 전에 철저한 학교 평가와 결과 공개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안으로 ‘교육섹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도 있다. 일정 지역의 학교들을 묶어 섹터를 만든 뒤 섹터 내에서 모든 학교 또는 1, 2개 학교에 지원하게 하고 추첨 배정한다. 이 과정을 통해 배정 불만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시도교육청들은 새 프로그램 개발의 어려움을 이유로 들어 기존 제도를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학교 선택권을 넓히기 위해 시도해볼 만하다.

또 근거리 배정 원칙을 더 충실히 하려면 ‘동(洞)’ 기준인 현행 방식에서 ‘통(統)’ 단위까지 세분화하자는 의견까지 있다.

○서울 ‘고교 선택’ 내년부터 36개교로

현재 서울은 시청을 기준으로 반경 4km 이내에 있는 29개 고교를 대상으로 ‘선지원 후추첨제’를 실시하고 있다. 2006학년도부터 반경 5km에 36개 고교로 늘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학생들은 2개교를 필수적으로 선택하고 최대 3개 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데 지원 순서와 거주지 등을 반영해 학교가 결정된다.

서울시교육청은 “도심 A고는 지원자가 정원의 30%밖에 안 되는 등 29개 고교 중 매년 절반 정도의 학교가 미달된다”며 “부족 인원은 일반 배정으로 채운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2003년부터 선호도가 낮은 고교를 대상으로 영어, 중국어, 음악 교육 등을 차별화한 ‘교육과정 특성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03년 17개교로 시작해 올해는 40개 고교로 확대했고, 내년에는 50개 고교로 늘릴 계획이다.

○특목고-자립형 사립고 확보가 관건

학교 배정은 결국 다양한 교육 수요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동국대 박부권(朴富權·교육학) 교수는 “학교 배정 방법만 바꿔서는 다양한 교육 수요를 만족시키기 어렵다”며 “우수 학생은 조기 진급하거나 영재교육원에서 공부하게 하는 등 학교 밖에서도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위해 현재 192개인 영재교육원을 2010년까지 250개로 늘리고 혜택 대상 학생도 전체 초중고교생의 0.3%에서 1%(8만 명)까지 늘리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우수 학생이 선호하는 과학고는 전국에 17개, 외국어고는 22개이고 학생 수는 2만1393명으로 전국 고교생의 1.2%밖에 안 된다.

올해 의정부과학고(경기 제2과학고), 동두천외고, 한국외국어대 부속외고, 전북외고 등 4개 학교가 새로 생긴다. 2006년에는 울산과학고, 수원외고, 성남외고, 충남외고, 국제고(인천) 등 5개교가 문을 연다.

등록금과 교육과정 책정권을 갖는 자립형 사립고도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민족사관고(강원 횡성군), 상산고(전북 전주시), 현대청운고(울산), 포항제철고(경북 포항시), 광양제철고(전남 광양시), 해운대고(부산) 등 전국에서 6개교가 시범 운영 중이다. 학생 수는 4760명.

상산고는 2005학년도 입학 경쟁률이 3.5 대 1이었다. 신입생 360명 중 전북 학생은 26.8%인 97명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서울 수도권 출신 학생들이다.

학부모 이모 씨(42·서울 성북구)는 “학부모들이 전주까지 자녀를 보낼 정도로 특성화된 교육을 원하는 욕구가 높은 만큼 이런 학교를 서울에도 많이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은 2001년 중동고 이화여고 경희고 등 19개교가 자립형 사립고 전환을 신청했지만 유인종(劉仁鍾) 당시 서울시교육감이 “계층간 위화감을 조장하고 입시과열 등의 폐해가 우려된다”고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그러나 공정택(孔貞澤) 현 교육감이 자립형 사립고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앞으로 도입 전망은 밝은 편이다.

학교 배정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고교 평준화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교육부는 입시경쟁 과열과 계층간 위화감 심화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평준화 해제에 반대하고 있다. 대신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면서 자립형 사립고 확대 등을 통한 보완책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평준화론자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교육의 시장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강력 반대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양승실(梁承實)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대입 실적으로 학교를 평가하는 경향이 강한 만큼 전반적인 학교 교육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교육 불만’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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