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편지]작은 비늘 하나라도 더듬어 볼수 있었으면

  • 입력 2005년 1월 14일 16시 32분


정이현 작가,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아무리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세상이 좁아졌어도 두고 온 사람과 꿈조차 함께 꿀 수 없는 엄연한 시공의 거리를 느낍니다.

사연을 전하려 기계를 두드려도 가슴 속으로 되돌아오는 공명, 턱없는 중년의 객수에 잠을 설칩니다. 비행기에 지니고 오른 오세영 시인의 시집 ‘봄은 전쟁처럼’을 꺼내 듭니다. ‘홈페이지’라는 제목의 시가 가슴을 후빕니다. ‘패스워드를 바꾸어버렸구나/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네 방으로 가는 길/…/찾아도 찾아도 얽히기만 한 인터넷 경로/그 어느 빈 방 창밑에 앉아/ 잃어버린 첫사랑을 탐색한다.’

아메리카 땅에서는 ‘법’이라는 신종 무기로 세계를 정복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젊은이 수만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도서관과 강의실에 진을 치고 삽니다. 나는 미국 헌법이라는 이 나라 특산물이 과연 수출 상품의 가치가 있는지 따지고 있지요. 나의 서툴고 거친 영어에 학생들은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예외적인 나라입니다. 풍요와 오만으로 가득 찬 그들은 스스로 우주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져온 수첩에 ‘을유(乙酉)년’이라는 금박이 눈부십니다.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아직도 귀에 쟁쟁한 60년 전의 가락, 이젠 나라도 갑자만큼 성숙해졌겠지요. 또 한 겹 나이테를 덮어 쓰면서 새삼 생명의 신비에 경탄합니다. ‘나의 생명이야기’. 황우석, 최재천, 김병종, 중년 남자 셋이 함께 얽어 낸 생명 연습은 싱싱하고도 상쾌합니다. 자연과학자 둘과 한 사람의 화가, 동갑내기 세 스타 학자의 합작품인 이 책은 자연, 동물과 인간, 그리고 신까지도 어우르는 통합의 힘과 여유가 넘치더군요.

서울을 떠나기 직전 김지하의 아홉 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을 읽었어요. 그는 ‘풍자냐 자살이냐’와 ‘타는 목마름으로’로 이 땅 민주의 화신이 되었지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는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했고, 그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민주의 희망을 걸었지요. 그 김지하가 예순넷에 쏟아 낸 이야기는 거대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일상적 삶으로서의 질병과 아픔이군요. ‘저 먼 쓸쓸한 바다까지/가 마침내 내 두 아이를/만나 기어이/데리고 돌아올까/유목과 은둔의 집이여/오랜 내 새 집에’.

정이현 작가, 새해에는 만년필로 눌러 편지를 쓰고 싶군요. 펜촉 끝에 세월의 아픔과 무게가 함께 실린다면 더 이상 소망하지 않겠습니다. 잃어버린 시대와 느낌이 되살아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내 땅의 역사에서 떨어진 비늘 하나라도 더듬었으면 합니다. 좋은 꿈 달게 꾸세요.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미국 샌타클래라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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