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전하려 기계를 두드려도 가슴 속으로 되돌아오는 공명, 턱없는 중년의 객수에 잠을 설칩니다. 비행기에 지니고 오른 오세영 시인의 시집 ‘봄은 전쟁처럼’을 꺼내 듭니다. ‘홈페이지’라는 제목의 시가 가슴을 후빕니다. ‘패스워드를 바꾸어버렸구나/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네 방으로 가는 길/…/찾아도 찾아도 얽히기만 한 인터넷 경로/그 어느 빈 방 창밑에 앉아/ 잃어버린 첫사랑을 탐색한다.’
아메리카 땅에서는 ‘법’이라는 신종 무기로 세계를 정복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젊은이 수만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도서관과 강의실에 진을 치고 삽니다. 나는 미국 헌법이라는 이 나라 특산물이 과연 수출 상품의 가치가 있는지 따지고 있지요. 나의 서툴고 거친 영어에 학생들은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예외적인 나라입니다. 풍요와 오만으로 가득 찬 그들은 스스로 우주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져온 수첩에 ‘을유(乙酉)년’이라는 금박이 눈부십니다.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아직도 귀에 쟁쟁한 60년 전의 가락, 이젠 나라도 갑자만큼 성숙해졌겠지요. 또 한 겹 나이테를 덮어 쓰면서 새삼 생명의 신비에 경탄합니다. ‘나의 생명이야기’. 황우석, 최재천, 김병종, 중년 남자 셋이 함께 얽어 낸 생명 연습은 싱싱하고도 상쾌합니다. 자연과학자 둘과 한 사람의 화가, 동갑내기 세 스타 학자의 합작품인 이 책은 자연, 동물과 인간, 그리고 신까지도 어우르는 통합의 힘과 여유가 넘치더군요.
서울을 떠나기 직전 김지하의 아홉 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을 읽었어요. 그는 ‘풍자냐 자살이냐’와 ‘타는 목마름으로’로 이 땅 민주의 화신이 되었지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는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했고, 그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민주의 희망을 걸었지요. 그 김지하가 예순넷에 쏟아 낸 이야기는 거대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일상적 삶으로서의 질병과 아픔이군요. ‘저 먼 쓸쓸한 바다까지/가 마침내 내 두 아이를/만나 기어이/데리고 돌아올까/유목과 은둔의 집이여/오랜 내 새 집에’.
정이현 작가, 새해에는 만년필로 눌러 편지를 쓰고 싶군요. 펜촉 끝에 세월의 아픔과 무게가 함께 실린다면 더 이상 소망하지 않겠습니다. 잃어버린 시대와 느낌이 되살아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내 땅의 역사에서 떨어진 비늘 하나라도 더듬었으면 합니다. 좋은 꿈 달게 꾸세요.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미국 샌타클래라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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