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 입력 2005년 1월 27일 15시 38분


눈 덮인 잘츠부르크 구시가지의 전경. 왼쪽 언덕 정상에 세워진 중세의 요새와 그 아래 바로크풍의 대성당이 보인다. 사진 정태남 씨
눈 덮인 잘츠부르크 구시가지의 전경. 왼쪽 언덕 정상에 세워진 중세의 요새와 그 아래 바로크풍의 대성당이 보인다. 사진 정태남 씨
《묀히스베르크 언덕 위에 11세기 세워진 호엔 잘츠부르크(Hohen Salzburg) 요새에 올라섰다. 북쪽으로는 바로크풍의 아기자기한 시가지 모습이, 남쪽으로는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어디선가 알프스 샘물같이 맑은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얼굴을 스치는 눈바람은 기품이 있고도 동심에 찬 경쾌한 교향악 같다.

세 개의 푸른 언덕이 둘러져 있는 잘츠부르크 구시가지는 이탈리아풍의 바로크 건축들과 정원, 도나우 강으로 흘러가는 잘차흐 강이 이 도시에 매력을 더하여 준다.

바로 이런 환경에서 1756년 1월 27일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20세기 초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유럽의 심장 중의 심장, 잘츠부르크’라는 글에서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과거와 현재, 도시와 시골 어우러진 곳

‘잘츠부르크는 서쪽의 스위스와 동쪽의 슬라브 국가들, 또 북쪽의 독일과 남쪽의 롬바르디아(북부 이탈리아)의 중간에 놓여 있다. 또 도시와 시골의 중간, 과거와 현재의 중간이며, 바로크 왕후의 기품과 순박한 농민 모습의 중간이다. 모차르트는 바로 이러한 모든 양상을 타고났다. 중부 유럽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아볼 수 있으랴.’

이곳을 찾는 모차르트 순례자들은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모차르트 광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광장에 서 있는 모차르트 동상은 너무 거룩하고 영웅적인 자태여서 거부감부터 느껴진다. 이 동상에서 후기 고전주의 조각의 학구적인 엄정함은 느낄 수 있지만, ‘모차르트’라는 인간의 참모습이나, ‘로코코의 아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줄기의 우수(憂愁)가 내면 깊숙이 흐르는 그의 음악도 잘 연상되지 않는다.

이 동상은 뮌헨의 조각가 슈반탈러가 쟁쟁한 이탈리아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842년에 만든 작품이다. 제막식 때에는 모차르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헌정하는 칸타타를 작곡하여 지휘했다고 한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심가는 자동차가 없는 보행자 지역이다. 4∼6층짜리 건물들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는 번화가 게트라이데가세를 걸으면 마치 영화 세트장을 지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골목길 9번지 건물에는 오스트리아 국기가 길게 늘어져 있고 ‘Mozarts Geburtshaus(모차르트의 생가)’라고 큼직한 글씨가 박혀 있다.

1747년 남부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 건물의 4층으로 이주해 온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 레오폴트 모차르트 부부는 이곳에서 8년 동안 살면서 자녀를 일곱 낳았으나, 딸 난네를과 막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만 살아남았다.

이 집은 현재 모차르트 박물관 및 자료전시장으로 사용되는데, 그가 어렸을 때 사용하던 악기들과 가족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습득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창조해 낸 코즈모폴리턴 예술가였다.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 생가나 그가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던 대성당 외에도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 오르간 거장 파울 호프하이머 등 숨결 생생

성 베드로 묘지(St. Petersfriedhof)에는 이곳에서 활동했던 오르간의 대가 파울 호프하이머,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이자 교회음악의 대가로 손꼽히던 미하엘 하이든 등과 같은 유명한 인물들의 묘소도 있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대주교청을 구심점으로 하는 활발한 지방문화의 중심지로, 뛰어난 음악가들을 각지에서 불러들였다는 뜻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도 물론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음악가들이 고용되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모차르트가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데 당시 잘츠부르크의 문화 환경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모차르트는 25세 때 잘츠부르크를 완전히 떠난다. 숨통을 조이는 듯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이자 코즈모폴리턴적인 대도시 빈을 본거지로 삼았다. 10년 후, 가난 속에서 35세라는 짧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모차르트 효과’ 굴뚝없는 문화산업으로▼

잘츠부르크의 고급스러운 특산품 초콜릿 ‘모차르트쿠겔’을 파는 상점.
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와 관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신성시된다. 심지어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상표로 쓰는 초콜릿도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기념품이 된다.

그의 이름을 걸고 1년 내내 열리는 여러 가지 음악제는 ‘연기를 뿜지 않는’ 문화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 특히 1920년에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 등에 의하여 시작된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기간에는 입장료나 호텔 요금이 비싼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축제의 연주회장으로 가는 택시는 요금을 더 받는 경우도 있고, 레스토랑의 페스티벌 메뉴가 붙은 음식은 턱없이 비싸기만 하다. 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서는 음악가는 곧 전 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에 돈방석에 앉게 된다고 하니 잘츠부르크(Salzburg·소금의 도성)가 겔트부르크(Geldburg·돈의 도성)로 변한다고나 할까.

이곳이 모차르트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1965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잘츠부르크와 그 주변을 배경으로 촬영된 이래, 모차르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전 세계에서 몰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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