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 입력 2005년 1월 28일 17시 09분


조선후기 정조 때 주로 활약한 김득신의 풍속화 ‘강상회음(江上會飮)’. 어부 여러 명이 물고기 한 마리를 반찬으로 놓고 식사하고 있다. 19세기 서양인들은 조선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는다며 ‘동양의 대식가’로 불렀다. 이는 짜게 절인 생선이나 짜고 매운 김치를 곁들여 오로지 밥을 많이 먹는 데 급급했던 식습관 때문으로 분석된다. 사진 제공 사계절
조선후기 정조 때 주로 활약한 김득신의 풍속화 ‘강상회음(江上會飮)’. 어부 여러 명이 물고기 한 마리를 반찬으로 놓고 식사하고 있다. 19세기 서양인들은 조선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는다며 ‘동양의 대식가’로 불렀다. 이는 짜게 절인 생선이나 짜고 매운 김치를 곁들여 오로지 밥을 많이 먹는 데 급급했던 식습관 때문으로 분석된다. 사진 제공 사계절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주영하 지음/280쪽·1만5000원·사계절

한국 하면 떠오르는 대표음식 김치. 민속학을 전공한 저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김치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논문과 책을 썼고, 한국인들이 김치를 먹기 시작한 시기가 오래됐음을 입증하는 연구에 몰두했다.

그랬던 그가 바뀌었다. 조선시대 풍속화 속에 담긴 음식을 연구한 글들을 잡지에 연재하면서였다. 3년간 연재한 이들 글을 새로 정리해 책으로 펴낸 저자는 풍속화 속에 김치가 등장한 경우가 없음에 주목했다.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 유명 화가와 작자 미상의 풍속화 속에는 쌀 떡 엿 술 우유 두부 조기 숭어 불고기 국수는 등장해도 김치는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김치가 우리의 대표적 음식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성이 본격 대두한 1920년대부터다. 저자는 여기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결합시킨 가설을 제시한다.

김치를 한국의 대표 음식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어쩌면 서양의 눈을 빌려서 우리 것을 바라본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가 낳은 것일지 모른다는 것. 또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민족적 주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빚어낸 ‘새로운 전통’이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대표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쌀에 주목한다.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은 동양의 대식가로 조선인을 꼽을 만큼 우리는 쌀밥 위주의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무릎 위에 어린 아이를 올려놓고 밥이나 그 밖의 음식을 마구 먹이고, 배가 넉넉히 팽팽한가 보기 위해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배를 두드려 보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김득신의 그림 ‘강상회음(江上會飮)’ 속 어부들의 식사 장면에는 밥과 한 마리 숭어찜만 등장한다. 숭어찜처럼 짜고 매운 김치도 밥을 많이 먹는데 도움이 되는 반찬으로 개발된 것이다. 결국 밥이 주고 김치는 종인 셈이었건만 오늘날에는 김치가 주가 되고 밥은 잊혀지고 있다.

조선시대 쌀은 그저 음식만이 아니었다. 조상을 의미하거나 사람의 생명을 상징하기도 했다. 신윤복의 ‘무녀신무(巫女神舞)’에서는 굿판의 제물로 쌀이 등장한다. 술안주와 잔칫상에 등장하는 인절미 등 떡도 찹쌀로 만든 것이다. 조상 제사에는 밥이 으뜸이고, 굿에서는 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술은 또 어떠한가. 저자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에서 늙은 들병이(병술을 파는 여자)가 길가에서 파는 술을 설명하면서 일이 급한 사람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는 ‘앉은뱅이 술’을 소개한다. 앉은뱅이 술은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양력 4월 5일 무렵) 때 담는 술의 별칭이다. 이 청명주로 유명한 것이 평양의 감홍로주와 한산의 소국주, 홍천의 백주, 여산(현재 익산)의 호산춘주가 있는데 이들 술은 모두 찹쌀이나 멥쌀을 주원료로 하는 술이다.

단오절 때 별미로 각광받은 흰엿 또한 찹쌀이나 멥쌀로 물엿을 만든 뒤 이를 졸여 강엿을 만들고 다시 가열해 녹인 뒤 늘여서 만든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한국의 전통음식이라 믿어지는 것이 근대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 18세기 구황작물로 보급됐다고 알려진 고구마가 전국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근대적 품종개량을 통해서였다. 조선시대 국수는 대부분 메밀국수였으며 밀가루가 대중화된 것은 1930년대 말 일제가 전쟁에 몰두하기 위해 혼식을 장려하면서였다.

조선후기 풍속화 23장을 통해 음식사를 다룬 이 책은 이미지 속에서 역사를 읽어내는 ‘픽처링 히스토리(Picturing History)’라는 최근의 역사기술 양식에 부합한다. 그러나 저자도 지적하듯이 풍속화 또한 당대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한 현상만을 선택해 표상화한 것이다. 즉, 풍속화에서 빠져 있는 또 다른 실재가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책의 묘미는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근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도발적 문제의식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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