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76>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2월 4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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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이 엉뚱하게도 한왕을 뒤쫓는 대신 제나라를 다시 치겠다고 하자 범증은 애가 탔다. 귀담아 그 말을 들어줄 만한 사람은 모두 내세워 패왕의 뜻을 바꿔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는 방금 패왕과 마주앉아 있는 우(虞) 미인도 있었다.

“대왕께서는 다시 제나라로 군사를 내시렵니까?”

향내 짙은 나무 살에 고운 깁을 바른 부채로 패왕을 부치던 우 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패왕이 뜻밖이란 듯 빙글거리며 되물었다.

“그건 왜 묻느냐? 또다시 전포를 입고 나를 따라 싸움터를 돌아다니기가 두려우냐?”

“제 한 몸 고단함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또다시 팽성이 도적들에게 넘어갈까 걱정되어 그렇습니다.”

“무엄하구나. 그 무슨 소리냐?”

“이번에 돌아와 보니 궁궐 안에서 저와 함께 대왕을 모시던 여인들은 모두가 적장의 노리개가 되어 끌려가거나 난군 중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왕의 도성이라 믿고 옮겨와 살았던 골육과 친지들도 태반이 죽거나 다치고, 재물은 빼앗겼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어야겠기에….”

패왕의 물음에 대답하던 우 미인이 문득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패왕도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과인이 제나라로 간다면 그런 일이 생긴다고 보느냐?”

“제나라의 반적들은 비유하자면 살갗에 난 부스럼이나 버짐같이 하찮은 병입니다. 그러나 한왕은 염통이 썩고 간과 쓸개가 짓무르는 것처럼 마땅히 서둘러 다스려야 할 중병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이제 또 제나라부터 치려하심은 부스럼이나 버짐이 가렵다고 성을 내시어 가슴과 배의 중병을 돌보지 않으시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자 패왕은 퍼뜩 머릿속에 잡혀 오는 것이 있었다.

(아부(亞父)의 수단이 너무 비루하구나. 아무리 일이 급하기로서니 한낱 궁궐 안의 여인네에게까지 손을 내밀 수 있느냐.)

속으로 그렇게 헤아리자 범증에게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그 말을 한 것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 미인이었다. 겨우 화를 억누르고 무거운 목소리로 받았다.

“그 말이 어째 네 말 같지 않구나.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일 중에서도 가장 크고 무거운 일이다. 군왕인 내가 알아서 할 터인즉 아녀자인 네가 걱정할 바 아니다. 오늘 네 얘기는 안 들은 것으로 하겠다.”

패왕이 그렇게 잘라 말하자 우 미인은 낯빛이 발그레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때 근시 하나가 급히 달려와 알렸다.

“범(范)아부께서 대왕을 급히 찾으십니다. 용저와 종리매 장군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는 소문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입궐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우 미인과 즐길 흥이 식어있던 참에 다시 급한 소식이 들어오자 패왕은 바로 대전으로 돌아갔다. 가보니 범증과 계포를 비롯하여 팽성에 남아있던 장수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먼 길을 달려온 듯한 전령(傳令)이 풀 죽은 얼굴로 서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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