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트’의 대본을 윤석화보다 먼저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아, 주인공 비비안은 그 누구도 아닌 석화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평소 ‘적역(適役)’이라는 말을 부정해 왔다. 배우는 모름지기 모든 역을 ‘적역’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비안은 윤석화였다.
윤석화는 ‘세 자매’(2000년) 이후 거의 5년 만에 ‘위트’를 갖고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얼마나 윤석화를 기다렸는지 깨달았다. 또 윤석화 같은 배우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윤석화는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우리의 머리를 쭈뼛 서게 만들고 긴장시키는 배우다.
난소암 말기인 비비안이 고통을 호소할 때 그 고통과 아픔이 객석에 있는 나에게 생생하게 전이돼 왔다. 나는 걱정됐다. 두 달 동안의 연습, 그리고 6주일간의 공연이 끝났을 때 과연 윤석화가 온전할까?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이런 배역을 맡으면 배우는 ‘실제로’ 황폐해진다. 무대 위의 ‘연기’는 결코 ‘연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굿나잇 마더’를 할 때 나는 매일매일을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늙어 갔다. 수심에 찬 얼굴, 처진 어깨, 머리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는 실제 상황이었다.
‘위트’를 보며 관객들은 운다.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극중 비비안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영문학 교수’였다. 그는 항상 자기의 ‘머리’를 믿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병을 앓고 죽어 가면서 ‘가슴’을 찾으려 한다.
이 연극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현대를 너무 머리로만 산다. 그러나 죽음 앞의 비비안은 머리가 아닌 ‘따뜻한 가슴’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이 작품은 모처럼 만나는 진지하고 고급스러운 연극이다.
요즘 연극들은 너무 가볍다. 즐겁고 가벼운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막상 그런 연극을 보고 극장을 나서는 마음은 쓸쓸하다. 연극은 너무 쉽게 써서도 안 되고, 쉽게 만들어서도 안 되며, 쉽게 봐서도 안 된다. 연극이 TV 드라마나 뮤지컬과 다른 점은, 조금은 고통스럽게, 그리고 긴장을 동반해서 봐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윤석화는 올해 쉰이다. 공교롭게도 극중 배역도 그렇다. 배우에게 물리적 나이는 중요하지 않지만 때로는 나이가 상징적으로 느껴지고 남다르게 다가오는 작품이 있다. 이번 연극에서 그는 한층 더 성숙된 모습과 매력을 보여 주었다.
윤석화. 그는 이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나도 믿는다.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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