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김명화]연극이 준 선물

  • 입력 2005년 2월 20일 18시 11분


저물녘 극장에선 막이 오른다. 보통사람이라면 가족과 둘러앉아 오붓하게 식사를 하거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그 시간에, 나는 밤일 나가는 여자처럼 총총히 집을 나서곤 한다. 누군가가 만든 연극을 구경하기 위해서. 또 내 작품이 공연되는 날이면 그 공연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운 좋게 지인들을 만나면 방금 본 연극을 안주 삼아 밤이 이슥하도록 혹은 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운다.

나에겐 하루가 끝나가는 그 어두운 시간들이 본격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정점의 시간이다. 다른 연극쟁이들 역시 태반은 마찬가지일 터. 문득 생각해 보니 낮밤이 뒤집어진 그 생활이 벌써 이십년이 되었다. 풋내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 다소 과장하자면 나는 인생이 재미없어 무슨 수든 내야만 했다. 하여 덜컥 ‘서클’에 가입했는데 정신 들어 보니 연극반이었고 대학시절로 끝내리라 다짐했건만, 부모님 표현대로라면 그 ‘미친 짓’을 여태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무대공포증 때문에 배우는 못하고,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쓰는 것뿐이어서 연극에 관련된 글을 쓰는 일이 그만 내 업이 되고 말았다.

연극 때문에 인생이 행복해졌는가? 그렇진 않다. 사실 그건 기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작은 일에도 행복해하고 타인과 잘 어울리고 시비를 가리는 것에 무관심한, 그런 멋진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 것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는 편집 벽에 대인기피증 환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대충 넘어가는 일에 혼자 숨통 막혀 하며 원칙이 무엇인가 토 달고 논쟁하고 때론 싸움까지 불사하는 스타일이다.

아마도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면 세상살이에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아무도 골치 아픈 나를 상대해 주지 않아 인생이 퍽 고독하였을 테니까.

연극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가장 고마운 것은 무언가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을 주었다는 점이다. 제법 무료했을 인생, 연극을 보고 만들면서 나는 그 시간들을 어느 정도 견뎌낸 듯하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고, 그 만남 속에서 타자와 소통되지 않는 고약함과 소통되는 경이로움을 그토록 강렬하게 체험하게 해준 것 역시 연극이었다. 하이에나 떼처럼 덤벼들어 내 작품을 뜯어고치는 연출가와 배우를 만나며 지옥도 가 보았고, 반대로 내 텍스트에 섬세하게 생기를 불어 넣는 제작진을 만나 천국의 맛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가난과 불안정함, 그것들을 견뎌내는 악의 없는 술자리와 순진한 광대 근성 역시 연극이 준 것이었고. 완성되자마자 허물어지는 무대의 운명을 지켜보면서 영원함이 없는 인생에 대해,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곧 사라질 순간의 진실들이 눈물겹다는 것도 연극이 가르쳐준 것이다.

인도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여태까지의 나는 신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고, 앞으로의 나는 내가 신에게 드릴 선물’이라고. 내겐 연극이 그렇다. 조악한 풀처럼 세상에 잘 붙지 않건만 나는 연극에 기대어 용하게 여기까지 왔다. 부디 앞으론 나도 연극에게 무언가를 드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연극이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길….

▼약력▼

1966년생.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 및 중앙대 연극학과 졸업. 작품으로는 ‘새들은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는다’ ‘돐-날’ ‘카페신파’ 등이 있다. 삼성문학상(2002년), 대신문학상(2002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4년) 등을 수상했다.

김명화 희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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