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의 庭園

  • 입력 2005년 3월 10일 15시 20분


어디까지가 정원이고, 어디부터가 자연인가. 한국의 정통정원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초봄의 정원에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담은 정취가 묻어난다. 사진은 호암미술관 정통정원 화원. 강병기 기자
어디까지가 정원이고, 어디부터가 자연인가. 한국의 정통정원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초봄의 정원에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담은 정취가 묻어난다. 사진은 호암미술관 정통정원 화원. 강병기 기자
《서양에서는 이맘때면 집 앞 정원을 가꾸면서 봄을 준비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정원을 가꾸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취미로서의 ‘가드닝(정원 가꾸기)’이 정착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원 자체가 사라진 때문이다.

정원은 어디로 갔을까.

밀양산업대 조경학과 이유직 교수는 “근대이후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정원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 정원의 맥이 끊겼고, 1960, 70년대에는 주로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는 ‘국토 복원’용으로만 나무를 심어왔다. ‘먹고 살기’에 바빠 경치를 가꾸는(造景) 일에서 멀어져 있었다. 주거공간도 아파트를 중심으로 빠르게 현대화되면서 지금은 정원을 가꿀 만한 땅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다.

우리 시대의 한국적 정원을 찾아 나섰다.》

한국 전통정원은 자연을 있는 그래도 담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문에 서양인들 '정원이 아닌 경치'라며 의아해하기도 한다. 사진은 창덕궁 비원 부용정. 동아일보 자료사진

○ 자연에서 빌린다

헤르만 헤세는 ‘즐거운 정원’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작고 선한 정원이 놀랍게도 우리에게 색다른 생각과 여운을 선사한다. 정원을 꾸리면서 느끼는 창조의 기쁨과 창조자로서의 우월감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한 뙈기 땅을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바꾸어 놓는다.… 작은 꽃밭, 몇 평 안 되는 헐벗은 땅을 갖가지 색채의 물결이 넘쳐 나는 천국의 작은 정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정원(garden)은 둘러싼다는 뜻의 라틴어 ‘gar’와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의 ‘eden’ 또는 ‘oden’에서 나왔다. 헤세의 말처럼 사람의 ‘창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동양 정원의 전형처럼 알려져 있는 일본의 정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정원을 ‘자연의 축소판’으로 봤다. 한정된 공간 안에 자연의 모든 것을 오밀조밀하게 배치해 자연을 최대한 재현하려 한다. 계절과 관계없이 늘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 상록수를 많이 쓴다.

반면 한국은 정원을 ‘자연의 연장’으로 봤다. 사람의 손길 없이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담아낸다.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엔 녹음이 우거졌다가 가을에 잎이 져 겨울엔 앙상한 모습을 드러낸다. 서양인들은 창덕궁 비원을 보고 “정원이 어디 있느냐. 이곳엔 풍경만이 있을 뿐인데…”라고 의아해 한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조경학과 정재훈 교수는 “일본식 정원은 사람이 독선적으로 만들지만 한국 정원은 자연의 순리에 맞춰 구성한다”고 설명했다. 한 예로 한국정원에서는 분수를 찾을 수 없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데 이를 거스르는 것은 순리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분수 대신 연못이나 폭포를 쓴다.

○ 전통 모티브 되살린 ‘희원’

담과 석등 등 옛 궁궐의 전통조경을 테마로 정원을 만든 서울시내 한 아파트. 자연을 벗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나의 '정원'이 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앞 전통정원 ‘희원’은 조경 전문가들이 근대 한국정원의 원형으로 꼽는 곳이다. 전통정원과 관련된 전문 인력을 총동원해 설계와 시공까지 4년이 걸렸다.

희원은 현존하는 한국 전통정원의 각종 수법과 모티브를 콜라주 형식으로 총망라한 전통정원의 ‘백과사전’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한국정원의 ‘교과서’인 창덕궁 비원을 중심으로 삼았고, 입구의 보화문은 덕수궁 유현문을 본떴다. 진입로의 죽림은 별서정원(사대부들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낙향해 지은 것)의 대표작인 담양 소쇄원에서 모티브를 땄다. 꽃담의 길상무늬는 경복궁 자경전의 굴뚝, 후원은 창덕궁 낙선재의 화계를 원형으로 했고, 연못은 경북 영양 서석지, 석축은 영주 부석사의 것이 모태다.

이유직 교수는 “희원은 단순히 기존 정원을 ‘베끼는’ 차원을 넘어 전통의 모티브를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한국정원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각 장치를 배치하고 정원을 둘러싼 풍경과 조화시킨 것은 작가의 현대적 ‘해석’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희원에는 전통성과 현대성이 공존한다. 설계를 할 때 이곳의 옛 지도를 가져다 두고 훼손된 경관을 되살려나가는 데 주안점을 뒀다. 원래 언덕이었던 곳은 다시 언덕으로 만들어 주는 식이다. 한국정원의 키워드인 차경(借景·경치를 빌려 옴)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희원의 중심인 주정(主亭)에 서서 앞쪽을 향하면 담이 보이지 않는다. 담을 일부러 낮게 배치해 앞에 펼쳐진 호수와 산의 풍경이 정원과 이어져 보이도록 했다. 정원과 자연의 경계를 흐려둔 것이다. 이곳에서 정원은 자연으로 확장되고, 자연이 정원으로 들어온다.

그럼에도 정원의 기능적 측면을 잊지 않는다. 미술관 앞 정원이라는 존재 목적에 맞도록 미술관에 진입하는 ‘길’로서의 성격을 부여하고, 문화행사를 열 수 있는 별도 공간을 두어 현대성을 살렸다.

○ 해외에서도 잇따라 주목

희원을 설계한 사람은 조경설계 ‘서안’의 정영선 대표다. 삼성 영빈관 승지원과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 내 전통공원, 선유도공원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줄곧 이 시대에 맞는 한국정원을 구현하는데 힘을 쏟아 왔다.

정 대표는 전통정원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재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통성을 살리는 것은 좋지만 현실을 무시하고 정원을 꾸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가령 옛것과 똑같은 전통정원을 만들기 위해 모두에게 한옥에서 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업을 할 때 우선 조상들이 정원을 꾸미던 정신을 떠올려 보고 정원의 목적과 기능, 건축물과의 상관관계를 파악한다. 그리고 나서 방지(네모난 연못·땅을 상징하는 한국 정원의 대표적 요소)나 담, 화계(꽃계단) 등 한국정원의 요소가 각자의 기능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화할 수 있도록 재배치하는 순서를 밟는다.

최근에는 해외에서도 한국정원에 대한 재발견 움직임이 일고 있다.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 등에 이어 미국 로스앤젤레스, 중국에서도 한국 전통정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미국 교포사회 학술모임인 한국정원학회는 이르면 내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식물원에 한국 전통정원을 만들 계획. 미국에 한국정원을 조성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식물원의 마크 웜스 원장은 최근 방한해 창덕궁 비원과 호암미술관 희원, 전남 담양 소쇄원 등을 둘러봤다. 그는 돌과 물, 심지어 죽은 나무에까지도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을 만들기보다 어울리고자 했던 한국 정원의 기본 정신에 연신 감탄하기도 했다.

중국 광둥(廣東) 성 광저우(廣州) 시에는 경기관광공사가 올해 안으로 한국 전통정원을 조성할 계획. 지난해 착공식도 마친 상태다.

‘해동경기원’이라는 이름의 이 정원은 중국인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곳이니만큼 한국정원은 물론 전통 건축의 대표적인 요소를 총망라할 예정. 입구의 솟대로부터, 큰 마당과 누대를 지나 정원과 작은 한옥에 이르기까지 중국 속 ‘작은 한국’을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 삼라만상이 나의 정원

이교원 연세대 건축공학과 겸임교수는 가장 자연에 가까운 정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한국적 정원의 틀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내 중심가의 교보빌딩 파이낸스센터 한국프레스센터 웨스틴조선호텔 삼성본관 등 웬만한 대형건축물의 조경을 맡아온 그는 개발논리가 온 사회를 휩쓸던 시절에도 “조경은 숲이다. 숲은 자연이다”는 철학을 일관되게 펴 왔다.

그의 작품은 오래된 숲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 크고 작은 나무와 각종 꽃, 풀을 적절히 조합해 생태계가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자연 그 자체다.

주거형태가 대부분 아파트이고, 자기 소유의 땅 한 뙈기도 갖기 힘든 현실에서 한국적 정원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정재훈 교수는 “집 안에 화분 하나만 제대로 들여 놔도 한국적 정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난 화분 하나로도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내 삶에 자연을 끌어들 수 있다는 것.

굳이 집 안에 자연을 들여놓아야 정원이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자연과 자주 벗하고, 즐길 수만 있다면 삼라만상이 다 내 정원이 될 수 있다.

한국정원 양식 가운데 정자가 ‘산수정원’이라 하여 특히 발달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주변의 자연이 한눈에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곳에 정자를 세워두고,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자연을 앞마당처럼 즐겼던 것. 그런 의미에서 조경전문가들은 도심 곳곳에 서있는 정자를 두고 ‘생뚱맞은’ 전통정원의 재현이라며 반기를 든다. 거리 경관과 어울리지도 않고 기능적으로도 아무런 효용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안빈낙도’의 대표적 가사인 정극인의 ‘상춘곡’은 이렇게 적고 있다.

“수간모옥을 벽계수 얇O 두고 송죽 울울리예 풍월주인 되어셔라”(초가삼간을 시냇물 앞에 지어두고 송죽이 울창한 속에 바람과 달의 주인이 되었구나).

잃어버린 우리의 정원은 내 집 뒷산에 있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전통정원서 봄의 정취 느끼세요▼

《봄나들이를 계획하고 있다면 고즈넉하고 소박한 한국 전통정원은 어떨까. 정원의 나무 하나, 돌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친구처럼 아낀 옛 선비들의 뜻을 헤아리면서 봄의 정취를 느껴보자.

그러나 정원도 아는 만큼 보인다. 이런 인문학적 의미를 함께 감상하려면 사전에 관련 서적 등을 통해 ‘예습’을 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허균·다른세상), ‘풍경을 담은 그릇 정원’(박정욱·서해컬처북스) 등은 전통정원을 상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다음은 전문가들이 꼭 가볼 만한 전통정원으로 추천하는 네 곳.》

○ 비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의 후원. 다양한 정자와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한국 전통정원이다. 북쪽 깊은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옥류천 인근 지역은 근처의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등 정자와 함께 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비원 관람의 하이라이트. 임금과 신하들이 이 곳에 둘러 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지난해 28년 만에 일반에 개방했으며 생태계 보전을 위해 매일 3회, 한 회당 50명씩으로 관람 인원을 제한한다. 매월 25일을 전후해 다음 달 관람객을 인터넷(www.cdg.go.kr)으로 예약 접수한다. 입장료 5000원, 소요시간 2시간. 02-762-0648

○ 소쇄원

(전남 담양군)

조선시대 학자인 소쇄 양산보가 지은 민간 정원으로 ‘기운이 맑고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유교사상을 철저히 담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정원으로 꼽힌다. 절대 팔지 말고,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양산보의 유언에 따라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뻗어있는 대나무밭을 지나면 담을 따라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널리 이용했으면서도 원래 모습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조성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 하서 김인후가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소쇄원 48영’이 유명하다. 또 계류에 걸쳐 있는 다리를 건너면 매화를 심어둔 매대가 있는데 매대 뒷담에 우암 송시열이 훗날 쓴 글씨를 눈여겨보자. www.soswaewon.org

○ 부용동 정원

(전남 완도군)

고산 윤선도가 51세 때 제주도로 내려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보길도의 경치에 매료돼 들어와 지은 별서정원. 그가 ‘선경’이라고 찬탄했듯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세연정 일대가 이곳의 핵심 구역. 산에서 흘러내려온 시냇물을 막아 만든 세연지와 회수담이 있고, 두 연못 사이 인공 섬에 세연정을 세웠다. 세연지는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뱃놀이를 했던 곳으로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을 회화처럼 시로 읊었다. 어부사시사에서 윤선도는 “하늘 땅이 제각기인가 여기가 어디메뇨”라면서 자연 속에 세운 ‘열린 정원’을 노래했다. 보길면사무소 061-550-5611

○ 서석지 정원

(경북 영양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민가 연못. 요(凹)자형 연못의 물 위로 드러나거나 잠겨 있는 바위들인 서석군(瑞石群)이 이곳의 핵심 관람 포인트. 서석지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물 위에 보이는 것이 60개, 잠겨 있는 것들이 30개 정도다. 이곳 주인이었던 석문 정영방은 이들 바위마다 유교적 생활철학이나 도가적 염원 등을 담은 이름을 붙여 두었다. ‘탁영반’은 “세상이 올바르면 벼슬을 하고, 어지러우면 은둔한다”는 뜻을, ‘관란석’은 “배우는 자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도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원 출입문 오른쪽 담 귀퉁이에 있는 400여 년 된 은행나무도 장관이다. 영양군청 054-682-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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