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화장실의 작은 역사’…유럽 문명발달史

  • 입력 2005년 3월 11일 16시 34분


15세기 독일의 민속화. 용변을 보는 사나이의 머리 위 다락에도 변기가 보인다. 사진 제공 들녘
15세기 독일의 민속화. 용변을 보는 사나이의 머리 위 다락에도 변기가 보인다. 사진 제공 들녘
◇화장실의 작은 역사/다니엘 푸러 지음·선우미정 옮김/212쪽·8500원·들녘

여성은 일생에 평균 376일, 남성은 291일을 ‘볼일 보는 데’ 보낸다. 성(性)과 더불어 가장 개인적 영역에 속하는 일이 바로 배설이다. 그러나 ‘묻어두고 끝날 일’만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화장실의 역사를 통해 공중위생, 도시의 확장, 농경의 변천, 문명권 간 접촉, 기술의 발전까지 들여다보고 있다. 유럽 문명권으로 설명을 한정하긴 했지만 저자를 따라 ‘화장실 타임머신’을 타는 재미가 있다.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랜 화장실은 기원전 2800년 스코틀랜드의 신석기 주거지인 스카라브레. 배수구로 통하는 움푹한 벽 구멍이 화장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로서는 선진 생활을 누렸던 셈이다. 좌변기는 300년 뒤 인더스 문명 유적에 처음 등장한다.

로마시대는 공중화장실의 황금기였다. 비누가 없는 대신 소변으로 빨래를 했던 세탁업자들은 길가에 그릇을 세워놓고 소변을 받아갔다. 4세기 로마 중심지에만 400여 개의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마르티알리스의 시에는 화장실로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 화장실에서 시를 낭송하는 시인 등이 나온다. 오늘날처럼 ‘사적인 영역’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요강이 집집마다 필수품이었다. 1371년 파리 시 당국은 주민들이 창문에서 요강을 쏟을 때 행인들이 피하도록 ‘물 조심’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과 영주들은 성 지하의 거대한 분뇨통에 ‘거름’을 모아두었다가 배출했다. 118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에어푸르트에서 어전회의를 열었으나 참극이 빚어졌다. 마룻바닥이 부식으로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참석자들이 분뇨통에 빠진 것. 영주 세 명과 백작 다섯 명이 죽었고, 황제는 대들보를 붙잡아 겨우 화를 면했다.

오늘날의 수세식 변기는 16세기 말 영국의 존 해링턴이 발명했다. 해링턴은 ‘물탱크에서 물고기를 기를 수도 있다’고 자랑했다. 이때까지도 분뇨는 밭의 거름이 되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1844년 프랑스는 ‘암모니아폴리스’라는 복합 산업단지를 건설해 소변을 화학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됐다. 뒤이은 화학비료의 발명으로 분뇨의 위상이 추락했기 때문이다.

‘닦개’의 변천도 화제다. 그리스인들은 납작한 돌이나 점토조각을, 로마인은 스펀지와 헝겊을, 16세기 프랑스인은 대마와 밀기울, 양털을 선호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9세기에 화장지를 사용한 기록이 나온다.

‘기체’의 배설도 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에라스무스가 ‘방귀 나올 때는 기침을 해서 소리를 숨겨라’고 썼다는 기록이 웃음 짓게 한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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