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최근 공간을 주제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건축가 김석철 명지대 건축대학장이 펴낸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창비)는 한반도라는 공간에서의 권력 재편을 직접 겨냥했다. 이 책은 새만금 방조제를 해양도시 건설로 전환하고, 행정수도 이전 대신 4∼6개 권역의 클러스터를 개발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1830년∼1870년 프랑스 파리라는 공간을 무대로 근대자본주의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추적한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 나무)와 근대적 정원에는 자본주의 이후 두드러진 계층간 주거공간의 차이를 숨기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음을 규명한 ‘에덴의 정치학’(성균관대출판부)은 공간의 정치경제학을 따진 책이다.
마이클 디어 등 세계적 공간과학자 37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공간이론 석학과의 대화’(한울아카데미)를 비롯해 2025년 세계 도시인구 50억 명 시대에 대한 세계위원회(World Commission)의 보고서인 ‘미래의 도시’(한울아카데미)는 미시 공간 연구에 집중하는 포스트모던 공간학을 담은 책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에서 이런 공간연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공간의 정치경제학’‘녹색사회의 탐색’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국내 공간 연구의 개척자로 꼽히는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공간을 둘러싼 한국적 갈등은 3개 차원의 공간 개념의 모순이 중첩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3개 차원의 공간은 자연적 공간, 사회적 공간, 사이버 공간을 말한다. 자연적 공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으로 근대화 이전에는 철학적 사유와 지리적 발견의 대상이었다. 사회적 공간은 경상도나 강남구처럼 사회적 제도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곳이다. 근대화는 자연적 공간을 사회적 공간으로 바꿔가는 확장의 과정이며, 고도자본화는 이 공간을 다시 상품화하고 서열화하는 심화의 과정이다.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가 공간의 상품화를 낳았다면, 민주화는 그 가치 등락을 둘러싼 이해다툼을 치열하게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분권화는 결국 수도권 대 비수도권, 강남 대 강북처럼 차별적으로 진행된 공간질서의 재편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권력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환경 인식의 확산이 낳은 자연적 공간에 대한 가치 재평가가 겹쳐지고, 사회적 공간을 규정하던 물질성과 규범성을 전복하는 사이버공간이 중첩되면서 한국의 공간 문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조명래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분권화는 이런 복잡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조급하게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반발을 초래하고 있다”며 “님비 현상도 지역이기주의로만 볼 게 아니라 주거권에 대한 자각의 결과라는 점에서 이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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