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말아톤’ 주인공은 세상 모든 엄마들”

  • 입력 2005년 3월 16일 15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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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아톤’에서 자폐아 초원이의 엄마 역으로 23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배우 김미숙(오른쪽)과 초원이의 실제 모델인 배형진 씨의 어머니 박미경 씨가 14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한 카페에서 반갑게 만났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20여 년간 한 길을 걸어온 ‘인생의 마라토너’란 점에서 아름답게 닮았다. 이종승 기자
영화 ‘말아톤’에서 자폐아 초원이의 엄마 역으로 23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배우 김미숙(오른쪽)과 초원이의 실제 모델인 배형진 씨의 어머니 박미경 씨가 14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한 카페에서 반갑게 만났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20여 년간 한 길을 걸어온 ‘인생의 마라토너’란 점에서 아름답게 닮았다. 이종승 기자
《자폐 청년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담은 휴먼드라마 ‘말아톤’이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관객 500만 명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1월 27일 개봉된 이 영화는 2월 첫째 주부터 5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는 기염을 토하며 13일 현재 전국 관객 489만 명을 동원했다. 이 영화가 예상대로 이달 말 500만 관객을 넘어설 경우 지난해 2월 ‘태극기 휘날리며’가 500만 명을 돌파한 이래 1년여 만에 나오는 ‘대박’ 영화가 된다. 당초 “장애인이 주연이라 너무 어두울 것 같다”는 이유로 운동복과 마라톤용 신발을 지원한 한 스포츠 브랜드 외에는 어떤 협찬사도 붙잡을 수 없었던 이 영화가 이토록 놀라운 흥행기록을 세운 이유는 뭘까. 극중 자폐 청년 ‘초원’(조승우)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 김미숙과 초원이의 실제 모델인 배형진(22) 씨의 어머니 박미경 씨가 14일 반갑게 만났다. 두 사람은 이 영화의 흥행 질주와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기쁠까, 슬플까, 아니면 겁이 날까.》

● 김미숙과 박미경

두 사람은 닮았다. 우선 1959년 생 돼지띠 동갑이다. 또 참 젊다. ‘국내 최고로 분위기 있는 여성’이란 타이틀을 놓친 적이 없는 배우 김미숙은 그렇다 치자. 20여 년간 자폐아이 뒷바라지로 갖은 고생을 다 한 ‘형진이 엄마’의 고운 얼굴은 의외다. “어머니의 표정이 나와 다를 거라고 예상했어요. 아주 전투적이고 차갑고 모질 것이라고요. 하지만 너무 편안하고 침착하고 여유 있었어요. 엄마의 표정이 저렇다는 건 그동안 쌓인 오랜 고통이 지긋지긋할 만큼 굳어져서 만들어진 거라는 느낌이 진하게 왔어요.”(김미숙)

이에 박 씨가 말한다. “회사 생활하던 형진이 아빠가 아이에게 더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며 봉제사업을 시작했지만, 가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작년에는 남편이 자살하고 싶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더군요. 20여 년간 단 한순간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요. 상처만 입다간 죽고 말 것 같았어요. 전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울 수밖에 없었어요.”

박씨는 “이 영화로 형진이와 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저런 여유도 있겠지’ 하더라고요. 솔직히 속으론 너무 다행이다 싶었어요. 아이가 장애인인데 생활까지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너무너무 싫었어요. 자존심도 상했고요”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인생을 ‘마라톤’처럼 살아왔다. 박 씨의 인내와 끈기도 그렇지만, 김미숙은 정말 위대한 ‘마라토너’ 같다. 1979년 데뷔한 그녀는 26년간 연기를 했고, 얼마 전 그만둔 유치원도 18년이나 운영했고, 1985년 ‘한밤의 인기가요’로 출발한 라디오 DJ도 지금껏 21년째다. 한국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그녀는 2003년 경북 구미의 경운대 경영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지난달 학사모를 썼다.

● 초원이 엄마와 형진이 엄마

23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면서 김미숙은 이런 결심을 했다. ‘김미숙 분위기에서 벗어나자. 옷은 무조건 주는 대로 입는다. 헤어스타일? 피부? 거울 절대 안 본다.’ 구두도 직접 동평화시장에 가서 샀다. 하지만 제작진이 ‘월남치마’를 강권할 땐 화를 냈다. “자폐아를 기르려면 계단도 뛰어 오르내리고 아들도 안아주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치마라는 걸 입을 수 있느냐”고.

이 말을 들은 박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난 치마가 단 한 벌도 없어요. 제 주위 많은 엄마들이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 나오는 김희애(자폐아의 엄마 역) 씨 차림을 싫어해요. 너무 잘 입고 너무 초연한 듯한 차림이라고. 아이와 전쟁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김미숙은 이 영화에 뛰어들면서 ‘이미지를 지키자’는 생각보다는 ‘배우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80년대에 제가 출연할 수 있었던 영화들은 ‘멜로’였지만 사실은 ‘에로’에 가까운 것들이었죠. 한번은 베드신을 찍었는데, 다음날 어떤 신문에 대서특필된 거예요. ‘김미숙 전라로 열연’이라고. 베드신을 찍은 건 맞지만 ‘전라’는 없었거든요. 알고 봤더니 그 기자가 그 영화 속 다른 여배우가 전라로 찍은 걸 그렇게 잘못 쓴 거였죠. 전 그때 알았어요. ‘영화는 절대로 날 보호하지 않는다. 나를 보호해야 하는 건 나다’고. 이후 기다리다보니 23년이 흘렀네요.”

● 엄마

박 씨는 실제 아들 형진이 때문이 아니라, 둘째아들 때문에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형진이는 제가 안고 가야 할 업보라고 쳐요. 하지만 그 밑에 아들이 무슨 죄예요. ‘엄마가 실제로 나한텐 해 준 게 하나도 없다’고 아들이 말할 땐 정말 죄책감이 들어요.”

실제 이 영화는 김미숙에게 ‘엄마’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과거 자신이 운영하던 유치원에서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엄마는 5중 인격이 돼야 해요. 쉽게 화내고 소리 지르면 안 돼요”하고 강조해온 그녀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고 한다.

“차 타고 온가족이 함께 가는데 아들(6)과 딸(4)이 서로 내 자리다 네 자리다며 싸우는 거예요. 어른들도 끼어들다 보니 부부싸움이 됐죠. 속상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정말 애들 키우기 어렵다고요.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아무 것도 아니다. 애들 붙잡고 함께 울 정도까진 가봐야 엄마 노릇 끝난다’고요. 사실 그래요. 아이들 낳기 전엔 ‘손가락 발가락이 10개씩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간절함이 있었어요. 그 고마웠던 순간을 내가 쉽게 잊은 것 같아요. 말귀 알아듣고 엄마가 회초리 들면 무서워할 줄이라도 아는 아이들을 가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를 본 많은 엄마들이 그걸 느꼈으면 해요.”

이에 박 씨는 “20년을 달려왔는데도 결론은 원점이었다. 하지만 형진이는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관객들의 가슴에 ‘아이가 나보다 하루 먼저 죽기를 바라는’ 이 엄마의 마음이 가 닿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김미숙의 여섯 살짜리 아들은 이 영화를 엄마와 두 번 보았다. 이젠 그림책을 보다 비 내리는 장면이 나오면 이렇게 웃으며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엄마, 비가 주룩주룩 내리나요?”

이미 ‘초원이 엄마’와 ‘형진이 엄마’는 500만 명의 가슴에 비를 주룩주룩 내렸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영화 ‘말아톤’ 속 명대사들▼

▽“초원이 다리는?”(엄마) “백만 불짜리 다리!”(초원) “몸매는?”(엄마) “끝내줘요!”(초원)=마라톤에 나가는 초원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엄마가 질문을 던지면 초원이가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순간.

▽“우리 아이에게 장애가 있어요.”=초원이를 치한으로 오해한 한 청년이 초원이를 때리자 얻어맞던 초원이가 절규처럼 반복하는 말.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게 소원이에요.”=“소원이 뭐냐”는 잡지사 기자의 질문에 엄마가 대답하면서.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자 빗속에 뛰쳐나온 초원이가 어쩔 줄 몰라하면서.

▽“초원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요.”=마라톤 코치와 숨 가쁘게 달리고 난 뒤 풀밭에 누워 헐떡거리며.

▽“200시간이 아니라 20년을 벌 받으며 사는 기분을 알아요?”=불평하는 마라톤 코치에게 초원이 엄마가 울분을 터뜨리며.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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