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숙과 박미경
두 사람은 닮았다. 우선 1959년 생 돼지띠 동갑이다. 또 참 젊다. ‘국내 최고로 분위기 있는 여성’이란 타이틀을 놓친 적이 없는 배우 김미숙은 그렇다 치자. 20여 년간 자폐아이 뒷바라지로 갖은 고생을 다 한 ‘형진이 엄마’의 고운 얼굴은 의외다. “어머니의 표정이 나와 다를 거라고 예상했어요. 아주 전투적이고 차갑고 모질 것이라고요. 하지만 너무 편안하고 침착하고 여유 있었어요. 엄마의 표정이 저렇다는 건 그동안 쌓인 오랜 고통이 지긋지긋할 만큼 굳어져서 만들어진 거라는 느낌이 진하게 왔어요.”(김미숙)
이에 박 씨가 말한다. “회사 생활하던 형진이 아빠가 아이에게 더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며 봉제사업을 시작했지만, 가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작년에는 남편이 자살하고 싶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더군요. 20여 년간 단 한순간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요. 상처만 입다간 죽고 말 것 같았어요. 전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울 수밖에 없었어요.”
박씨는 “이 영화로 형진이와 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저런 여유도 있겠지’ 하더라고요. 솔직히 속으론 너무 다행이다 싶었어요. 아이가 장애인인데 생활까지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너무너무 싫었어요. 자존심도 상했고요”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인생을 ‘마라톤’처럼 살아왔다. 박 씨의 인내와 끈기도 그렇지만, 김미숙은 정말 위대한 ‘마라토너’ 같다. 1979년 데뷔한 그녀는 26년간 연기를 했고, 얼마 전 그만둔 유치원도 18년이나 운영했고, 1985년 ‘한밤의 인기가요’로 출발한 라디오 DJ도 지금껏 21년째다. 한국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그녀는 2003년 경북 구미의 경운대 경영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지난달 학사모를 썼다.
● 초원이 엄마와 형진이 엄마
23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면서 김미숙은 이런 결심을 했다. ‘김미숙 분위기에서 벗어나자. 옷은 무조건 주는 대로 입는다. 헤어스타일? 피부? 거울 절대 안 본다.’ 구두도 직접 동평화시장에 가서 샀다. 하지만 제작진이 ‘월남치마’를 강권할 땐 화를 냈다. “자폐아를 기르려면 계단도 뛰어 오르내리고 아들도 안아주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치마라는 걸 입을 수 있느냐”고.
이 말을 들은 박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난 치마가 단 한 벌도 없어요. 제 주위 많은 엄마들이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 나오는 김희애(자폐아의 엄마 역) 씨 차림을 싫어해요. 너무 잘 입고 너무 초연한 듯한 차림이라고. 아이와 전쟁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김미숙은 이 영화에 뛰어들면서 ‘이미지를 지키자’는 생각보다는 ‘배우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80년대에 제가 출연할 수 있었던 영화들은 ‘멜로’였지만 사실은 ‘에로’에 가까운 것들이었죠. 한번은 베드신을 찍었는데, 다음날 어떤 신문에 대서특필된 거예요. ‘김미숙 전라로 열연’이라고. 베드신을 찍은 건 맞지만 ‘전라’는 없었거든요. 알고 봤더니 그 기자가 그 영화 속 다른 여배우가 전라로 찍은 걸 그렇게 잘못 쓴 거였죠. 전 그때 알았어요. ‘영화는 절대로 날 보호하지 않는다. 나를 보호해야 하는 건 나다’고. 이후 기다리다보니 23년이 흘렀네요.”
● 엄마
실제 이 영화는 김미숙에게 ‘엄마’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 과거 자신이 운영하던 유치원에서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엄마는 5중 인격이 돼야 해요. 쉽게 화내고 소리 지르면 안 돼요”하고 강조해온 그녀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고 한다.
“차 타고 온가족이 함께 가는데 아들(6)과 딸(4)이 서로 내 자리다 네 자리다며 싸우는 거예요. 어른들도 끼어들다 보니 부부싸움이 됐죠. 속상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정말 애들 키우기 어렵다고요.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아무 것도 아니다. 애들 붙잡고 함께 울 정도까진 가봐야 엄마 노릇 끝난다’고요. 사실 그래요. 아이들 낳기 전엔 ‘손가락 발가락이 10개씩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간절함이 있었어요. 그 고마웠던 순간을 내가 쉽게 잊은 것 같아요. 말귀 알아듣고 엄마가 회초리 들면 무서워할 줄이라도 아는 아이들을 가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를 본 많은 엄마들이 그걸 느꼈으면 해요.”
이에 박 씨는 “20년을 달려왔는데도 결론은 원점이었다. 하지만 형진이는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관객들의 가슴에 ‘아이가 나보다 하루 먼저 죽기를 바라는’ 이 엄마의 마음이 가 닿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김미숙의 여섯 살짜리 아들은 이 영화를 엄마와 두 번 보았다. 이젠 그림책을 보다 비 내리는 장면이 나오면 이렇게 웃으며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엄마, 비가 주룩주룩 내리나요?”
이미 ‘초원이 엄마’와 ‘형진이 엄마’는 500만 명의 가슴에 비를 주룩주룩 내렸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영화 ‘말아톤’ 속 명대사들▼
▽“초원이 다리는?”(엄마) “백만 불짜리 다리!”(초원) “몸매는?”(엄마) “끝내줘요!”(초원)=마라톤에 나가는 초원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엄마가 질문을 던지면 초원이가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순간.
▽“우리 아이에게 장애가 있어요.”=초원이를 치한으로 오해한 한 청년이 초원이를 때리자 얻어맞던 초원이가 절규처럼 반복하는 말.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게 소원이에요.”=“소원이 뭐냐”는 잡지사 기자의 질문에 엄마가 대답하면서.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자 빗속에 뛰쳐나온 초원이가 어쩔 줄 몰라하면서.
▽“초원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요.”=마라톤 코치와 숨 가쁘게 달리고 난 뒤 풀밭에 누워 헐떡거리며.
▽“200시간이 아니라 20년을 벌 받으며 사는 기분을 알아요?”=불평하는 마라톤 코치에게 초원이 엄마가 울분을 터뜨리며.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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