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해안의 작고 한적한 마을. 드넓은 갯벌 한가운데 성이 우뚝 서 있다. 역시 몽생미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은 둘레가 900m인 작은 바위산 위에 지어졌다. 수도원이었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때는 요새로 사용됐던 곳이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혁명군이 감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을 빠져나와 국도에 접어들면 이내 한국인 관광객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이 있다.
국도 변, 눈에 띄는 곳에 내걸린 태극기와 기와집 모양의 안내판이다. 프랑스어로 ‘동양화 전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뜻밖의 인물이 반갑게 맞는다.
한국외국어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프랑스인 여동찬(77) 교수와 부인 박정자(67) 화백이다.
여 교수는 이미 한국에서도 낯익은 얼굴이다. “어서 오세요.”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든 마을에서 친척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이 건물의 1층은 박 화백의 개인화랑. 2, 3층은 부부가 사는 공간이다.
서울에 있는 줄 알았던 이들 부부가 언제 어떤 계기로 이곳에 터를 잡았을까.》
○ 모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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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몽땅 한국에 바친 ‘푸른 눈의 교수님’이 모국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1997년, 그러니까 한국에 뿌리를 내린 지 꼭 41년 만이었다. 수구초심이랄까. 부인도 선뜻 따라나섰다.
몽생미셸에서 그의 고향 트레비앙까지는 40km가 채 안되는 거리. 몽생미셸 성은 어릴 때 자전거를 타고 놀러 다니던 곳이다. 고향을 지근에 두고 굳이 이곳에 터를 잡은 데는 사연이 있다.
프랑스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그러자니 자금이 필요했다. 이곳저곳 수소문한 결과 한국의 한 대기업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회사 측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고 그래서 선택한 곳이 몽생미셸이었다.
부부는 고향에 이미 구입해둔 아파트를 두고 융자로 현재의 집을 구입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후원을 약속했던 기업이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하는 수 없이 1층에 화랑만 꾸몄다. 여 교수는 “마당에 자그마한 한국 정자라도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직은 작은 화랑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화랑을 낸 후 박 화백은 이 지역에서 ‘서양 풍경을 동양화풍으로 그리는 화가’로 이름이 났다. 그는 화선지에 한국의 천연 재료로 만든 물감을 사용해 노르망디의 바다와 들판, 성과 사람들을 그린다.
화랑을 찾는 현지인들은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조화를 이루는 동양화의 독특한 화풍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지역 평론가들은 “똑같은 풍경인데도 프랑스 화가들이 보는 시각과는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본다”고 평가했다.
올해 말에는 지역 출판사가 박 화백의 화보집을 출판할 계획이다. 노르망디를 여행하면서 그린 80여 점이 실릴 예정이다.
○ 프랑스 속의 한국
박 화백은 “이곳은 자연의 모습도, 색깔도 모두 마음에 쏙 든다”고 말한다. 한국과는 느낌이 다른 풍경을 그리다보니 한국에서 그림을 그릴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는 것. 그는 “맑은 날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태양빛이 변하고 드넓은 평원 위를 감싸듯 내려앉은 구름도 한국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박 화백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여 교수는 한국 문학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해두곤 한다. 한국 문학 번역을 후원해 주는 한국의 단체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언제라도 출판할 만큼 번역을 해두었지만 언제 출판될지 기약은 없다.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고 소일거리로 하는 것일 뿐”이라며 농담조로 말하지만 한국 문학을 프랑스에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이들의 집에는 한국풍 그림, 한국의 문학 작품집 말고도 약장 반닫이 돈궤 뒤주 같은 한국 전통 가구와 물건들이 그득하다. 화랑에 그림을 보러왔다가 한국 물건들에 반해 수십 년 지기처럼 친해진 이웃도 적지 않다. 얼마 전 여 교수가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들을 집으로 초대하자 친구들은 모두들 부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서울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한적한 마을에다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인데도 부부는 할일이 아주 많고 무척 행복해 보였다.
○ 앉은 자리가 꽃자리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까지 여 교수는 사실상 ‘한국인’이었다. 1956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선교를 위해 한국에 건너간 뒤 줄곧 한국에서만 지냈기 때문이다.
여 교수의 한국어는 어느 한국인보다 유창하다. 여동찬(呂東贊)이라는 한국명은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대구의 한 신부가 동쪽(東)을 도우라(贊)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1969년 한국외국어대에서 교편을 잡은 지 6년 만인 1975년 그는 성직을 버리고 교직에 매진하게 된다. “하나님을 잘 믿는 교인 노릇 하기도 힘든데 남을 인도하기는 더 힘들었어. 그래서 환속했지. 다른 이유는 없어.”
신분이 자유로워진 여 교수는 사상의 자유를 만끽했다. 한국 불교에 관심을 갖게 돼 동국대에서 불교를 배웠다. ‘고려시대 호국 법회’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땄고, ‘미륵신앙’을 주제로 박사 과정까지 수료했다.
여 교수가 박 화백을 만난 것은 환속한 지 6년째 되던 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박 화백은 조선호텔 미술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모범 사원으로 뽑힌 박 화백은 세계 여행을 부상으로 받았다. 그때 한 친구가 프랑스 여행을 준비 중인 박 화백에게 여 교수를 소개한 것이 인연이 됐다.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에 바래다주던 길이었다. 박 화백이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라고 하자 여 교수는 “‘우리’ 집이라고?”라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박 화백은 “그때는 몰랐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프러포즈였다”고 회상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박 화백의 집에선 ‘드디어 노처녀 시집 보낸다’며 외국인 사위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때 신랑 나이 쉰셋, 신부는 마흔셋이었다.
여 교수는 학교와 집, 직장 밖에 모르던 부인의 손을 이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자신보다 한국을 더 모르는 아내에게 한국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로부터 20여년. 이제 몽생미셸에 정착한 후로는 박 화백이 프랑스의 자연을 더 사랑한다. 지금까지 여 교수가 ‘한국인’으로 살아왔듯이 이제 박 화백이 ‘프랑스인’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여 교수의 고향에는 이들 부부를 위한 묏자리가 마련돼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에는 한글과 프랑스어로 구상 시인의 시 ‘꽃자리’를 새겨뒀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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