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액션 누아르 ‘달콤한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부조리’다. 이 영화는 모순된 두 가지를 정면충돌시켜 강렬한 불꽃을 만들기 때문이다. 진지하지만 장난스럽고, 사소하지만 중요하고, 피범벅 속에서 멜로드라마가 싹트며, 긴장의 극단에서 느닷없는 유머가 발사된다. 이런 부조리함은 ‘달콤한 인생’의 내용과 형식에 독특한 리듬감을 준다.
정확한 판단력으로 보스 강 사장(김영철)의 신임을 독차지하는 선우(이병헌). 어느 날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는 강 사장은 젊은 애인 희수(신민아)를 감시할 것을 선우에게 명령한다.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희수를 발견한 선우는 알 수 없는 망설임에 사실을 덮는다. 이 순간부터 선우는 조직에 붙잡혀 죽음의 문턱에 선다. 가까스로 도망해 조직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한 선우. 마침내 강 사장과 마주선다.
사건 자체가 가져야 할 힘이 의도적으로 거세돼 있는 ‘달콤한 인생’은 골다공증을 숨기고 있는, 참을 수 없이 섹시한 여인과 같다. 뼛속은 부실할지 모르지만, 그건 더 이상(어쩌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난감하다. 총알은 머리통을 박살내지만, 콸콸 쏟아지는 선홍빛 피가 새하얀 아이스링크 위로 번지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우니…. 이렇게 화면 ‘속’ 사연과 화면 ‘위’ 질감이 서로를 밀어내는 순간, 관객은 불안한 동시에 흥분된다. 이는 인물의 심리가 인물이 속한 세련된 공간과 겹쳐지는 순간이고, 스타일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순간이다. 총기 밀매나 하는 뚱뚱이 양아치까지 모피 코트를 입고 스스로 쿨한 척, 자기도 대단히 중요한 인물인 척하는 것, 이런 젠체하는 태도 자체가 ‘달콤한 인생’의 주제다.
‘달콤한 인생’을 끌어가는 건 이야기가 아니다. 캐릭터다. 따스한 듯 차가운 보스, 선우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넘버3’ 문석(김뢰하)과 중간보스 백사장(황정민), 살인기계 오무성(이기영)까지…. 영화는 이들 주변 캐릭터들을 재료로 해 선우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개의 동심원을 만든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선우와의 ‘1대 1’ 대치국면으로 끌어온다. 어떤 마카로니 웨스턴 못지않은 ‘맞짱’의 긴장과 폭력 에너지는 여기서 나온다.
‘달콤한’ 남자는 결코 아니지만, 이 영화의 위대한 발견은 황정민이다. 비열한 중간보스 역을 맡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 점잖은 관객이라도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영화 속) 그는 아마 한국 영화사상 가장 치졸하고 잔인하고 쓰레기 같은 ‘놈’이다. 순간으로 전체를 잡아먹는 연기란 이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병헌은 빛을 받아 맨들 거리는 손톱까지 멋지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공포, 확신과 불안이 함께 있다. 하지만 이런 그를 살짝 흔드는 여성으로서의 희수, 아니 신민아는 이해가 안 간다. 그녀의 역할이 팜 파탈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젖은 머리를 귀 뒤로 살짝 감아 넘기는 순간만으로도 그녀는 숨 막힐 정도의 존재감을 발산했어야 했다는 점이다. 평범한 그녀를 두고 멋들어진 남자들이 피 칠갑을 해 죽고 죽이며 난리법석을 떠는 것도, 하긴 부조리라면 부조리겠지만.
4월1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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