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성탄절 무렵,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 한국인 고학생이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병명은 급성폐결핵. 며칠이 지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그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시골 마을의 한 요양소에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3주간 피를 토하며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어느 늦은 밤 그가 눈을 뜨자 나이 지긋한 수녀 한 분이 그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수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것이 잘될 거예요.”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유학생을 향한 수녀의 진심어린 위로는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며칠이 지나 늦은 밤 다시 잠에서 깼을 때 그는 담당의사와 간호사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외국인 학생이 참 안됐어요. 결핵균이 양쪽 폐 전체에 퍼져 수술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에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수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 말에 희망을 걸기로 했고 1년 남짓한 치료 끝에 건강한 몸으로 요양소를 나왔다. 그 고학생은 30여 년이 지나 대학의 총장이 됐다.
덕성여대 신상전(辛相田) 총장은 “수녀의 위로가 없었다면 삶의 희망마저 잃어버렸을 것”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외국어대 안병만(安秉萬) 총장도 가장 힘들었던 유학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미국 플로리다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는데 언어장벽 때문에 거의 매일 밤을 새워도 미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한다.
어렵사리 한 학기를 마친 안 총장은 중도귀국을 생각하며 교정을 걷고 있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이때 우연히 만난 정치학과 알프레드 클루복 교수는 “자네 박사 과정 학생이지”라며 말을 건넸다. 이어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아직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는 안 총장의 말에 클루복 교수는 “방학 동안 주제를 생각해 보고 다음 학기에 나를 찾아오라”고 말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교수의 뜻밖의 관심에 안 총장은 당황하면서도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결국 안 총장은 클루복 교수의 문하생이 돼 무사히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법학도였던 이화여대 신인령(辛仁羚) 총장이 떠올린 배려는 은혜에 가까운 것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 1, 2학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신 총장은 3학년 때 당시 이화여대 법대 학장이었던 고(故) 이태영(李兌榮) 선생의 부름을 받았다.
이 선생은 개인적으로 지인들과 돈을 모았다며 장학금을 건넸다.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를 쓰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신 총장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 ‘특별 장학금’을 받았다. 신 총장은 “그분들에게서 받은 신뢰와 배려를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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