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태생으로 말년까지도 논문을 발표하다 2002년 별세한 가다머를 생각하면 나는 저절로 숙연해진다. 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환갑노인이 되도록 무명의 학자로 칩거해 있다가 나이 60세에 ‘진리와 방법’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내놓음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학자로 군림한 그 신실함은 내게 너무나도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해석학의 대가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에 대한 저자(고려대 명예교수·78·그림)의 이런 감탄은 저자 자신에게 돌려야 할지 모르겠다. 과학과 종교를 접목시키려 노력해온 노학자의 연구결과가 집약된 이 책이 경이로운 지적 섭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집는 순간 생물학, 인류학, 양자물리학, 천체물리학, 언어학, 철학, 신학, 윤리학, 인지과학, 동물행동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난해한 양자물리학 이론의 핵심적 의미와 마르틴 하이데거와 가다머처럼 악명 높은 현대철학가들의 사상에 대한 길안내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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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인 김용준의 연구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실로 저자가 40여 년간 차곡차곡 쌓아간 방대한 지식이 꼼꼼히 정리된 책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학자와 저서들은 일일이 거명하기조차 버겁다.
서구철학의 시조로 꼽히는 탈레스, 고전물리학을 완성한 뉴턴,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 서구 자본주의 발전을 개신교 윤리에서 찾은 막스 베버는 차라리 반갑다.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 언어학자 놈 촘스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멋쩍게라도 수인사는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서구철학의 개념적 모순을 밝혀낸 프란시스 콘퍼드, 문명의 발달을 기술이 아니라 표상능력의 결과임을 주장한 문화비평가 루이스 멈포드, 과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규명한 과학철학자 임레 라카토스, 분자생물학자로 불확정성의 철학을 펼친 자크 모노, 진화론의 한계를 지적한 진화론자 나일즈 엘드리지, 진화신학을 펼쳐가는 롤스톤 3세를 만나면 말문이 막힌다.
저자는 수백 명은 넉넉히 될 이런 연구자들의 사유를 단순히 풀어헤쳐놓지만은 않았다. 그들 사유의 친연성과 대립성을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했다. 그가 목표로 삼는 것은 이성(로고스)의 산물로 경험적 검증을 중시하는 과학에 열정(파토스)의 산물로 초월적 믿음을 중시하는 종교를 통합하는 것이다.
인류가 원시시대부터 이기적이고 공격적 존재라는 20세기의 상식을 허물어뜨린 인류학과 고고학의 연구결과부터 이성과 감성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얽혀 있다는 인지과학적 연구, 진화론이 종교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가능성 등을 제시한 새로운 신학자들의 주장까지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러면서 이를 가다머의 ‘지평융합’과 불트만의 ‘실존적 해후’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로 통합해 간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광신적 기독교인’이었으나 함석헌의 제자가 된 뒤 ‘과학 없는 종교는 미신에 불과하고, 종교 없는 과학은 흉기’라는 믿음을 평생 간직해왔다. 그래서 화학공학이라는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이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 때 두 차례나 해직교수가 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과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총체적 지식의 구축에 몰두해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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