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보려고 기대했던 건 실비아 플라스의 삶 전체에 강박돼 있던 시에 대한 욕구, 그 도발적이고 직설적인 상상력의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실비아 플라스와 그녀의 남편이자 당대 영국 최고의 시인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휴즈의 열병과도 같았던, 지독한 러브 스토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두 명의 위대한 시인에 대해 갖고 있었던 문학적 환상이 깨질 정도다.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치와 미덕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라고 하는 지극히 관념적인 미학적 행위라고 하는 것도 때론 비루하고, 때론 굴욕적이며, 때론 유치하고, 무엇보다 극히 사소한 일상의 관계와 그 갈등들에 대한 지식인적 외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최고의 지식인이자 시인인 실비아 플라스조차 늘 여자문제를 일으키는 남편 휴즈 때문에 고통을 겪었으며, 그런 일상의 고민과 방황이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을 더욱더 날카롭게 만들었다는 것이고, 이처럼 구체적 삶에 근거하지 않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래서 이 영화는 실비아 플라스를 조명하는 데 있어 예술보다는 그 구체적 삶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실비아’는 왠지 2%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기야 뭐, 이 영화는 영국 BBC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그 누가 요즘 같은 때 실비아 플라스의 전기영화 같은 비상업적이고 별반 관객이 들지 않을 듯한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겠는가. 실비아 플라스의 일생을 영화로 볼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BBC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영화의 완성도에 관한 한 조금 양보해도 될 일이지 싶다.
그런 면에서 실비아 플라스 역을 맡은 귀네스 팰트로에게 새삼 눈길이 가게 된다. 세계적으로 꽤 잘 나가는, 이른바 A급 스타로서 귀네스 팰트로는 요즘 작품 선택에 있어 독특한 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영화 ‘실비아’는 그녀의 스타 경력이나 편당 출연료를 올리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귀네스 팰트로는 아마도 자신 역시 연기를 하는 예술가로서 실비아 플라스의 정신세계에 도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귀네스 팰트로의 문학적 욕심은 조금 별난 측면이 있는 듯한데,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는 ‘포제션’이란 작품도 눈에 띈다. ‘포제션’ 역시 A S 바이어트의 독특한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었다.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블리드 대너(‘실비아’에서 실비아 플러스의 엄마로 출연하기도 한다)의 딸로서 귀네스 팰트로가 자칫 고만고만한 ‘2세 배우’가 되기 쉬운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자기 나름의 예술적 욕망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영화들 목록을 보면 그걸 잘 알 수 있다. 배역들이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로얄 테넌바움’과 ‘리플리’ ‘셰익스피어 인 러브’ ‘퍼펙트 머더’ ‘블러드 라인’ ‘위대한 유산’ 등등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도 편수가 꽤 많은 편이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성장하고 진보하는 느낌을 주는 배우가 오래가는 법이다. 귀네스 팰트로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오래 살아남는 배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영화 ‘실비아’는 얼마 전 상영된 귀네스 팰트로의 또 다른 주연작 ‘월드 오브 투모로우’보다 1년 앞서 만들어진 2003년 작이다. 국내에 뒤늦게 개봉되는 이유는 불문가지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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