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한왕은 반가웠다. 패왕이 조나라로 향할 것이란 말은 들었으나 그래도 너무 많은 군사를 밖으로 내보내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하던 차였다.
“그동안 주발이 오창과 용도(甬道)를 함께 지킨다고 몹시 고단하였을 것이다. 이제 오창의 영소(營所)는 조참에게 맡겨 지키게 해야겠다. 주발이 용도만 맡아 지키게 되면 설령 항왕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 해도, 오창에서 오는 군량이 끊기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장졸 500 기(騎)만 이끌고 그날로 오창에 있는 영소로 달려갔다.
다음날 조참이 오창에 이르자 먼저 가 있던 한왕이 그를 맞고 1만 군사를 떼어주며 오창의 수비를 맡겼다. 또 주발을 불러 빈틈없는 용도 수비를 거듭 당부한 뒤 조참이 이끌고 온 3만 군사들 중에 2만을 거두어 형양으로 돌아왔다.
패왕 항우의 대군이 조나라를 향해 떠났다는 소문에다, 다시 2만의 군사가 늘어나니 형양의 한나라 군사들은 더욱 기세가 올랐다. 그동안 은근히 졸이던 가슴을 쓸며 새롭게 전의(戰意)를 다졌다. 그런데 며칠 안돼 다시 반가운 소식이 형양으로 날라들었다.
“연왕(燕王) 장도(臧도)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우리 한나라에 항복하였습니다. 대왕께 변함없는 마음으로 충성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서하였다 합니다.”
그 말에 형양 성안은 마치 큰 잔치가 벌어진 듯 하였다. 오랜만에 아래위가 함께 마음 편히 술잔을 나누었다.
한왕도 행궁(行宮)에다 크게 술판을 벌이고 장수와 막빈들을 불렀다. 그런데 몇 순배 술이 돌기도 전에 가까이서 시중드는 신하 하나가 한왕에게 알렸다.
“알자(謁者) 수하(隨何)가 대왕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잖아도 군신(君臣) 간에 술이라도 나누려고 불렀는데, 새삼 무슨 일이냐? 어서 들라 이르라.”
한왕이 그렇게 말하자 술자리에 불려나온 사람 같지 않게 의관을 갖춘 수하가 들어와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한왕은 수하를 보자 여러 달 전 팽성에서 쫓겨 오다 우현(虞縣)에서 나눈 얘기를 퍼뜩 떠올렸다. 말만하고 움직이지 않은 일을 빈정거리듯 물었다.
“경은 전날 과인을 위해 회남(淮南)으로 가서 구강왕(九江王) 경포(경布)를 달래보겠다고 한 적이 있다. 경포가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에 맞서 항왕을 몇 달만 그곳에다 잡아둔다면, 그 사이에 과인은 천하를 얻을 수 있겠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벌써 반년이 넘도록 떠날 생각을 않으니, 그때 과인에게 한 말은 그저 유자(儒者)의 큰소리일 뿐이었는가?”
그 말을 듣자 수하가 정색을 하고 받았다.
“실은 그 일로 이렇게 온 것입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기로 그때 약조하신 대로 스무 명의 수행과 그에 따른 의장(儀仗)을 갖춰 주시고[이십인구] 구강왕께 바칠 폐백(幣帛)도 마련해주십시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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