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중에서》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온’ 흰빛들, 도처에 그득하다. 누가 삶으로부터 영원히 망명할 수 있겠는가. 꽃가지 아래로 천 년을 뛰어내린 꽃잎들, 올해도 다시 꽃가지 위에 앉았다. 늘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이어도 저 흰빛 그득한 봄날, 꽃잎의 점자를 한나절 읽을 수 있다면야….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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