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58) 씨의 산문집이다. 이 씨는 작가 후기에서 “어릴 적 척박하기만 하던 선산의 땅에 50년쯤 세월이 흐르니, 쌓이고 쌓인 낙엽 때문에 5cm쯤 표토가 생겼다. (내가 살아온 세월의) ‘50년 전’이란 말을 떠올리니 놀라움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썼다.
이 산문집은 최근 몇 년간 그의 삶 위에 쌓인 새로운 표토들에 대해 썼다. 그 가운데 몽골과 베트남, 그리스와 중국 미국을 체험했던 이야기들이 눈에 띈다. 특히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떠나온 지 33년 만인 지난해 말 베트남을 다시 찾았다.
“지난해 귀국하기 전날 반레 시인을 만난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는 함께 입대한 300명의 동료 중 (베트남 전에서) 다섯 명이 살아남았는데 자기는 전사한 295명의 삶을 대신 산다고 했다. 반레는 본명이 아니라고 했다. 시인을 꿈꾸었으나 전장에서 숨진 전우의 이름이란다. 나는 반레가 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베트남 중부 빈딘 성 따이빈 마을에서는 한국군에게 죽임을 당한 426명의 양민 이름이 새겨진 ‘증오비’가 최근에 ‘위령비’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구절은 읽는 이를 착잡하게 만든다.
이 씨는 프랑스 작가 자크 아탈리가 말한 “새 천년은 유목민의 시대”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세계를 장벽 없이 돌아다닐 수 있으려면 우선 자기 마음의 장벽부터 허물어야 한다. 이 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에서 가톨릭 신자와 (티베트) 불교도가 논쟁을 벌이는 것을 지켜봤다. 둘 다 극존칭 ‘히스 홀리니스(His Holiness·聖下)’를 썼지만 가톨릭 신자는 교황을, 불교도는 달라이 라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둘의 논쟁이 파국으로 가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입장 때문이었다. ‘우리의 천국은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천국을 한사코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씨는 의견이 아주 다르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단다. “그러셔. 누가 말려. 형은 상행선. 나는 하행선, 좋다, 이거여.” 이문구 소설집에 나오는 말이란다. 이 산문집 전반에 걸쳐 줄기차게 나오는 이 씨 특유의 넉살과 유머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정통한 그는 이번 책에서도 세계의 갖가지 문화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닮은꼴임을 알게 된다고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말한다. 이것이 ‘세계 유목민 시대’의 이해와 자기반성, 관용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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