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36>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19일 19시 1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지난번 초나라가 제(齊)나라를 칠 때 서초 패왕(覇王)은 몸소 싸움에 쓸 널빤지와 나무 몽둥이를 지고 사졸들의 앞장을 섰습니다. 패왕이 그럴진대 대왕께서도 마땅히 구강(九江)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 친히 그들을 이끌고 초나라를 위해 앞장을 서셔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겨우 군사 4000명을 보내 초나라를 돕게 하였을 뿐이니, 무릇 북면(北面)하여 신하로서 남을 섬기는 이가 어찌 그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왕이 대군을 이끌고 팽성으로 쳐들어갔을 때도 그렇습니다. 패왕은 아직 제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하셨으니, 대왕께서라도 구강의 군사를 이끌고 회수(淮水)를 건너 밤낮 없이 팽성 아래로 달려가셔야 했습니다. 하오나 대왕께서는 수만의 장졸을 거느리고 계시면서도 단 한사람도 회수를 건너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팔짱을 끼고 어느 쪽이 이기는지 구경만 하셨으니 무릇 남에게 자기 나라를 맡긴 사람이 어찌 그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자는 과인이 무엇 때문에 과인이 초나라를 섬긴다고 말 한다 보는가?”

아픈 곳을 건들린 셈이건만 경포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흔들림 없기는 수하도 경포에 못지않았다.

“대왕께서는 빈 이름만 내세워 신하로서 초나라를 섬긴다고 하실 뿐, 스스로에게 모든 걸 맡기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대왕께서 초나라를 저버리시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 한나라가 약하다고 여기시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비록 초나라 군사가 강하다 해도, 천하는 의롭지 못하다는 이름을 붙여 초나라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초나라 왕이 맹약을 어기고 의제(義帝)를 시해했기 때문이요, 싸움에 잘 이긴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강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한왕은 관동의 제후들을 거둬들이고 돌아와서는 성고(成皐)와 형양(滎陽) 사이를 지키고 있습니다. 촉(蜀)과 한(漢)에서 곡식을 날라 오며 도랑을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한 뒤에 군사를 나누어 변경과 요새를 막게 하니 그 지킴이 여간 단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한나라를 치려면 초나라 군사는 양(梁) 땅을 거쳐 적국 안으로 800,900리 깊숙이 들어가야 하며, 늙고 힘없는 백성들이 1000리 밖에서 군량을 날라 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초나라 군사들이 어렵게 형양과 성고에 이른다 해도 한나라가 굳게 지킬 뿐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아간다 해도 쳐부술 수가 없고 물러난다 해도 에움을 풀어줄 수가 없는 고약한 처지가 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초나라 군사는 믿고 기댈만한 군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또 하나 지나쳐 보아서 아니 되는 일은 천하 제후들의 마음가짐입니다. 만약 초나라가 한나라를 이기게 되면 제후들은 스스로 위태로움을 느껴 서로 돕고 구원해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어있는 초나라로 다투어 치고들 것이니, 곧 초나라가 강대하여 어떤 나라를 쳐부순다는 것은 천하 제후의 군사들을 모두 초나라로 불러들인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초나라가 한나라만 같지 못함은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이제 대왕께서는 모든 것이 안전한 한나라와 함께하지 않으시고 위태롭고 망해가는 초나라에 스스로 나라를 맡기려하십니다.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검푸른 경포의 얼굴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깊이 헤아려 보는듯하다가 갑자기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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