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에서]日 노벨상 작가의 국적넘어선 반성

  • 입력 2005년 5월 5일 18시 46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원로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70) 씨가 최근 한국에 보내온 글이 국적을 넘어선 문인의 양심을 드러내 감동을 주고 있다. 이 글은 24일 개막하는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그가 발표할 발제문 ‘우리는 나지막히 움직이기 시작해야 한다’.

일본의 대표 작가인 오에 씨는 이 글에서 한일간의 긴장이 고조된 최근 과거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편, 일본의 주류로 떠오른 보수 우익 세력에 맞서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젖을 먹으며 자란 군국 소년이었다”며 “일본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만행을 패전 후 알게 되면서 젊은 시절 내 작품들에는 죄의식의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전 후 전쟁 포기를 담은 새 헌법이 준 해방감은 생동감 넘치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1994년 무렵 이미 일본의 우경화가 시작됐다며 ‘일본 보수 우익의 총수’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曾根康弘) 전 총리를 비판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헌법에서 전쟁 포기 조항을 없애고 자위대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에 씨는 전쟁 포기를 선언한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9조의 모임’을 지난해 문인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다. 이 모임은 일본 언론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하반기 여덟 번의 강연회에서 2만 명을 모았다. 오에 씨는 “현재 일본 정부와 의회는 헌법을 개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일본은 아시아에서 고립된다”며 “우리는 국민투표에서 이를 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미 수십 년째 일본의 좌우파 모두로부터 “애매한 전후 민주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발표하는 글에서 이처럼 치열한 자기성찰과 양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간 오에 씨가 ‘실천하는 일본 지성’이라고 불려온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일본에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우리가 차분해질수록 일본 보수 우익의 목소리는 공감대를 잃어갈 것이다. 오에 씨와 문인 친구들의 ‘나지막한 움직임’이 기대된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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