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이 20세기 내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갈등과 충돌이 대부분 민족, 민족주의, 민족국가, 국민국가란 이름으로 행해졌음을 확인하면서 민족주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제프 에르네스트 르낭은 이미 1882년에 “민족이란 하나의 법과 하나의 주인이 세계를 지배할 경우 잃어버리게 될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언젠가는 유럽연맹이 민족을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민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하지만 민족을 자본주의 발달기에 나타나는 ‘상상의 공동체’(‘상상의 공동체’·나남출판)라고 주장해 온 베네딕트 앤더슨(정치학)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조차 지난주 서울에 와서는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번성할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중국의 중화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에 한국인들의 열정적인 ‘단일민족주의’까지 가세한 동북아의 현재 상황은 그의 주장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예로 두고두고 인용될 것이다.
한반도가 어떤 땅인가. 세계적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조차 “종족과 언어 면에서 동질적이며 단일국가로서의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세계에서 극히 찾아보기 힘든 지역 중 하나”(‘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창작과비평사)라고 지목한 곳이다. 중국 중심의 체제를 세계 전체의 질서로 알고 살았던 조선시대에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정해렴 역주, 현대실학사)’를 지은 정약용처럼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를 구성해 보려는 지식인들이 속출했던 곳이다.
적어도 한반도에서 민족주의가 쇠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일 듯싶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한반도에서 다시 의미를 찾으려면 먼저 ‘순수혈통의 단일민족 신화’가 저질러 온 과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동북아에 배타적 민족주의를 조장한 책임, 지배이데올로기에 동조한 책임,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을 차별한 책임….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역사비평사)의 저자인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철학) 도쿄대 교수는 전후(戰後) 세대인 자신이 모든 일본인에게 일본의 전쟁 책임을 요구하는 이유에 대해 나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독일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 공유된 것과 같은 ‘정의’의 척도가 동아시아 민족들 사이에서도 만들어져야 동아시아의 평화공존이 가능합니다.”
나와 내 민족만큼 타자와 타민족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 ‘정의’의 척도는 한국 ‘민족주의’도 피할 수 없다.
김형찬 고려대 연구교수·한국철학 kphilo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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