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원자탄이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됐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이 엄청난 사실을 8일자 1면 하단에 2단 크기로 대수롭지 않은 듯 다루었다. 제목에는 ‘원자폭탄’ 대신 ‘신형폭탄’이란 단어가 쓰였다.
이는 전시 일본의 언론통제 총본산이었던 ‘내각정보부’에서 국민의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원자폭탄’이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내내 여론조작과 신문 지도라는 명목으로 신문에 대한 통제업무를 맡았던 곳이 일본 내각정보부였다. 이들은 독일 나치의 전쟁선전술을 모델로 연구하며 ‘사상전’을 이끌었다.
정진석(언론학)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일제강점기 조선통치의 선전홍보기구 역할을 했던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일본어) 매일신보(한글) 서울프레스(영어)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새 책 ‘언론조선총독부’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저자가 책의 이름을 ‘언론조선총독부’라고 붙인 이유는 경성일보 매일신보가 단순한 언론기관을 넘어서 식민지 통치의 정치적 권력기구 역할을 했기 때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정무총감은 (총독부) 내부의 총감이고, 경성일보 사장은 외부의 총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경성일보 사장은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낸 화려한 경력의 직업외교관, 귀족원 의원, 현(縣) 지사 출신의 거물급이 임명될 정도로 정치적 비중이 컸으며, 신문은 총독부로부터 ‘관보’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일제 치하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후에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민간지에 대한 언론 검열을 총괄하던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도서과는 1926년 언론검열 부서로 독립할 당시 10명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이 터질 무렵인 1940년에는 36명으로 크게 늘었다. 도서과에 근무하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東京)제국대학 출신으로 재학 중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수재들이었다. 이들은 전문잡지에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업무와 관련해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검열을 담당하던 직원은 조선말을 어찌나 잘했던지 히로세 시로(廣瀨四郞) 같은 사람은 퇴임 후 한글로 발행되는 매일신보의 교열부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저자는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총독부 언론검열기구 등에 일본 최고의 엘리트들을 데려다 놓고 조선을 통치했을 만큼 일제의 언론통제는 주도면밀했다”며 “일제강점기 언론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민간지뿐 아니라 ‘친일언론의 총본산’이었던 총독부 기관지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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