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회 칸 국제영화제에 경쟁부문 후보작 ‘만델레이’를 들고 참석한 덴마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16일 기자 시사 후 전 세계 기자들 앞에서 토로한 심정이다. 트리에 감독은 칸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2000년)과 그랑프리(1996년)를 차지한 바 있는 칸이 낳은 거장. 경쟁부문에 ‘폭력의 역사’를 출품한 캐나다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도 시사 후 기자회견에서 “이야기의 보편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소라서 의도적으로 미국을 무대로 택했다”고 밝혔다. 크로넨버그 감독 역시 1996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바 있는 ‘칸의 총아’.
2005년 5월 칸 국제영화제는 ‘미국’이라는 문화적, 정치적 파워에 완전 포위됐다.
○흥행 신경쓰다 미국에 덜미 잡힌 칸
한때 미국 문화의 상업성과 천박함을 조소했던 칸 영화제가 ‘항복 선언’의 현장이 된 것은 영화제가 보인 행보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칸 영화제 집행위원회는 영화제의 흥행과 활기를 북돋우기 위해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슈렉2’를 개막작으로 선정했다. 이어 ‘정치적 선택’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을 신랄히 풍자한 다큐멘터리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티에리 프리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그러나 올해는 예술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고전주의’로 돌아갈 것”이라고 개막 전에 밝혔다. 그 결과는 빔 벤더스(독일), 트리에, 크로넨버그, 아톰 에고이안(캐나다), 구스 반 산트(미국), 짐 자무시(미국) 등 이미 검증이 끝난 거장들의 초청이었다.
그러나 이 거장들이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을 들고 왔고, 미국을 의식하는 발언을 쏟아내자 주최 측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올해 경쟁부문 후보 21개 작품 중 직·간접적으로 미국을 다루거나 배경으로 한 작품은 10편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슈퍼파워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스타워즈’. 올해 비경쟁부문 초청작인 미국 조지 루커스 감독의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는 현재까지 거장들의 경쟁부문 후보작들을 제치고 단연 칸 영화제를 뜨겁게 달군 작품이다.
○세계시장 85% 점유한 미국… 거장도 예외 없다
8년째 칸 영화제를 찾은 영화평론가 전찬일 씨는 “미국을 끌어들여 영화제를 활성화하려던 칸 영화제 측이 올해는 영화제의 자존심을 세우려다가 오히려 미국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에 부딪치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산업적 측면에서 올해 칸 영화제는 미국 영화의 공세를 막아내려는 유럽 국가들의 보루가 됐다.
17일에는 유럽연합(EU) ‘정보사회와 미디어 위원회’의 비비안 레딩 위원과 유럽의 주요 영화 및 방송통신사 경영진이 모여 인터넷을 통해 유럽 영화를 배급하는 방안을 주제로 회의를 가졌다. 이미 몇 년째 유럽 각국 극장 수익의 7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하는 상황에서 개봉도 못하고 사라지는 유럽 영화들을 살리기 위한 방책인 셈이다. 또 18일에는 EU 소속 25개 국가의 문화장관들이 참석해 할리우드 영화의 대공세에 맞서 유럽 문화(영화)의 다양성을 어떻게 지켜나갈지에 대해 토의하는 문화다양성 회의를 열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그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역으로 자신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은 더욱 강화하고 있는 미국. 2004년 세계 영화시장에서 미국이 차지한 비중은 85%였다. 제 아무리 세계관이 분명한 거장 감독이라도 결코 ‘미국’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다.
칸에 머물고 있는 영화평론가 이명희(47·여) 씨는 “미국에 대해 찬사를 하든, 비판을 하든 결코 흔들리지 않을 사실은 (영화들이) ‘미국’이라는 이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라며 “당분간 국제영화제는 미국이라는 문화적 정치적 자장 아래 놓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칸=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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