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이탈리아 피사

  • 입력 2005년 5월 19일 15시 49분


대성당, 사탑, 세례당, 캄포 산토 등으로 이뤄진 ‘기적의 광장’. 오른쪽 피사의 사탑은 피사 공화국의 운명을 암시하듯 1274년 3층이 완성되기 전 기울어지기 시작해 1350년에 기울어진 채 완성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대성당, 사탑, 세례당, 캄포 산토 등으로 이뤄진 ‘기적의 광장’. 오른쪽 피사의 사탑은 피사 공화국의 운명을 암시하듯 1274년 3층이 완성되기 전 기울어지기 시작해 1350년에 기울어진 채 완성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2세기에 걸쳐 완성된 ‘피사의 사탑’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린 ‘기적의 광장’(Piazza dei Miracoli). 이곳에 세워진 대성당, 사탑, 세례당, 캄포 산토(묘지건축)는 기능은 각각 다르지만 재질 색 디자인을 공유하고 있어 마치 한 세트처럼 보인다. 이 건축물들은 피사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기념물들이다. 지중해 서쪽의 해상권을 장악했던 강대한 공화국 피사는 12세기에 스페인 북아프리카와 교역하면서 크게 번성했지만 13세기 후반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1173년에 세워지기 시작한 종탑은 피사 공화국의 운명을 점치듯, 1274년 3층이 완성되기 전에 지반이 가라앉으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공사는 중단됐다가 1세기 후에 재개돼 177년 만인 1350년에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높이 56m의 사탑 위에 올라 물체 자유낙하 실험을 했고, 대성당 안에서 길게 늘어뜨려진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추의 진동이론을 정립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피사에서 태어났고 피사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한 그는 이론과 실험에 토대를 둔 근대 과학의 선구자였다.

그의 실험정신은 유명한 음악가이자 음악이론가였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1520∼1591)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피렌체 근교 태생의 빈첸초는 피사의 귀족 집안 규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일곱 낳았는데 장남이 갈릴레오이다.

빈첸초는 르네상스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이론과 실험의 병행을 중요시했다. 옛부터 음악이론은 화성이나 음정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현 길이의 비율이 어떠해야 조화로운 음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떻게 1옥타브를 나누느냐에 연구의 초점이 모아졌다. 빈첸초는 현의 장력과 음정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현 끝에 무게가 다른 추를 달아 음정의 변화를 실험하기도 했는데, 그가 이런 실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아들들이 곁에서 도와 주었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아버지에게서 이론을 통해 실험을 하고, 실험의 결과로 이론을 다시 정립하는 학문의 자세를 배우고, 과학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의 동생 미켈란젤로는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지만.

○ 리스트, 거룩한 뜰 ‘캄포 산토’서 靈感

기적의 광장에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곳은 ‘거룩한 뜰’이란 뜻의 캄포 산토. 십자군전쟁 때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가져온 흙을 이곳에 깔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4세기 초반에 그려진 벽화 ‘죽음의 승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크게 훼손됐지만, 사냥에서 돌아오는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와 기사들을 짓밟으려 하는 죽음, 구원받은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 죄지은 자들을 불 속에 던지는 악마가 어렴풋이 보인다. 이 벽화는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면서 신의 자비를 구하는 인간을 노래한 중세성가 ‘진노의 날’을 형상화한 듯하다.

1838년부터 1839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순례하던 리스트는 이 벽화에 영감을 받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로 그린 ‘벽화’를 구상한다. 이렇게 탄생한 곡이 ‘죽음의 춤’(Totentanz). 이 곡은 ‘진노의 날’의 선율을 주제로 한 변주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죽음과 투쟁하는 삶을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대비시켜 묘사한 듯하다.

캄포 산토는 피사의 역사적인 인물들이 묻혀있는 곳. 이곳을 거닐며 명상하던 리스트는 피사가 낳은 위대한 인물 갈릴레오의 묘소가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지 않았을까?

이탈리아어로 ‘갈릴레오’란 ‘갈릴리 사람’이란 뜻이고 ‘갈릴레이’는 복수형이니 그의 이름은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묻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고수해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그는 1633년부터 피렌체 근교에서 가택연금을 당했고 1642년에 죽었다. 그가 바티칸으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은 것은 1992년. 죽은 지 350년이 지난 뒤였으니 늦게나마 ‘죽음의 승리’를 쟁취한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해질 뿐이다. 피사의 사탑처럼.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갈릴레오 부친 음악이론가로 명성▼

피사가 낳은 유명인들이 묻힌 캄포 산토.

갈릴레오의 아버지 빈첸초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말기 바르디 백작이 주도한 일종의 ‘예술원’인 카메라타(Camerata)의 일원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극과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그는 음악이론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류트 연주법에 관한 책과 류트 연주곡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류트 연주에도 뛰어나 피렌체의 메디치 궁정이나 뮌헨궁정 등 여러 곳에서 초빙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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