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은 일제 암흑기에 사재를 털어 민족 문화재를 수집해 1939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보화각(간송 미술관의 전신)이라는 사립 박물관을 세운 우리나라 기업 메세나 운동의 선구자다.
“아버지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고 말한 전 화백은 “한번도 자식들에게 공부하라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일주일에 꼭 한두 번씩 자식들을 불러 놓고 음악 감상회, 미술 실기대회를 여셨다”고 회고했다. 간혹 좋은 문화재를 만나면 자식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으며 고서화점에서 단원 김홍도 그림을 발견하자 약주까지 곁들이면서 그림 설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전 화백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물감 세트를 사 주셨는데, 하도 귀한 물건이어서 화가인 아버지 친구가 빌려갔을 정도였다”며 “아버지 사랑방 약주 심부름하면서 어른들께 귀동냥하며 배운 게 나를 화가로 이끈 산 교육이었다”고 말했다.
“1·4후퇴 때 그 상자들을 그대로 부산으로 이송해 적산가옥 창고에 보관하다 환도 후 서울로 다시 가져왔어요. 서울로 다시 옮긴 뒤 1주일 후에 부산 창고에 불이 났으니 하마터면 다 잃어버릴 뻔했던 거지요.”
간송은 장남인 전 화백이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한 직후인 1953년 9월 난리북새통이었던 그 시절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라”며 미국 유학을 보냈다. 가난과 궁핍, 고독,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이라는 열등감과 싸우며 미국 서부 미술 명문대학인 캘리포니아 미술학교, 오클랜드 밀즈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전속 화랑을 가질 정도로 미국사회에서 성공했다.
미국인들은 대담한 붓질과 색감의 충만함이 특징인 그의 추상화면에 주목했고, 1960년 9월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연 ‘젊은 미국 1960’ 기획전에서 35세 미만 신진작가 30인에 그를 뽑을 정도였다.
고생 끝에 안착한 미국생활이었지만 전 화백은 부친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1964년 12월 귀국한다. 귀국 직후 1965년 연 첫 국내 개인전으로 개성적이고 신선한 젊은 화가로 인정받으며 한국화단에 입성했다.
당시 어둡고 우중충한 색감과 두꺼운 마티에르(질감)의 획일적인 추상에 식상해 있던 국내 화단은 화려하지만 엷고 가라앉은 색감인 그의 작품을 반겼다.
귀국 후 서울대 미대 교수, 부친이 인수한 보성재단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그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간송미술관을 미술문화재 연구의 산실로 지키며 미술계 발전에 기여해 왔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왔으며 특히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만다라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나에게 붓질은 마음속 때를 벗겨내는 수도과정과 같습니다. 만다라란 종교적인 개념 이전에 내면의 절대 순수, 절대 평화의 상태이며 이를 화폭에 옮기려 노력합니다.”
총 60여 점이 나오는 이번 고희전에는 1950년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볼스화랑과 전속계약을 하고 판매한 180여 점의 작품 중 수소문 끝에 입수한 20여 점도 공개된다. 27일∼6월 19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02-3217-0233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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