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한숨은 중국 사상가 왕후이의 ‘죽은 불 다시 살아나’(삼인)에서 또 들려온다. 왕후이 역시 루쉰 전공자니까 그 얘기가 책에서 빠질 수 없다. 왕후이는 루쉰이 “끝없는 세계, 무수한 인간들이 모두 나와 관련이 있다”라고 ‘잠꼬대’하자 무얼 느꼈는지 “나는 살아 있다”며 자신감을 되찾는다.
다케우치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한 것은 루쉰의 어둠이었다. 이 어둠은 뒷골목을 배회하는 ‘양아치’의 뒷모습 같은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그늘지고 음습하며 구린 냄새를 풍기는 것,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에 비유하자면 ‘아Q’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이래 일본인들이 ‘아시아’라고 할 때는 이 어둠이 전제돼 있었다. 아시아의 우등생인 일본은 이 양아치를 길들이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게 바로 ‘대동아전쟁’이라는 것이다. 다케우치는 이 전쟁의 실패에 한숨을 내쉰다.
우등생의 시각에서 보자면 아시아는 여전히 어둠을 연상시킨다. 아시아는 유럽처럼 균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유럽사는 존재하지만 아시아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는 그때그때 다르다. 2005년에 새삼 루쉰의 글들을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아시아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상상해야만 하는 아시아는 ‘영원한 혁명의 세계’, 우등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학의 세계다.
루쉰은 (우등생들이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선) “누구도 싸움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다. 태평하구나”라고 비판하듯 말했다. 이 말에 다케우치는 창피함을 면한다고 했고, 왕후이는 ‘나는 살아 있다’며 안도했다. 그 안도의 한숨으로부터 그들은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100년 전의 일들이 떠오르는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아시아란 과연 어떤 것일까? 여전히 아시아란 어려운 문제다.
김연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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