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의 나이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쌀뒤주에 갇혀 숨을 거뒀다. 정조에겐 엄청난 충격과 혼란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 불우한 환경을 딛고 18세기 문화 르네상스를 이룩해 조선 후기 최고의 왕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 각종 제도를 정비하며 왕조의 체계를 완성한 성종은 연산군을 낳았다. 그 위대한 왕에게서 포악한 연산군이 태어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길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대답을 어머니의 교육에서 찾는다.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있었기에 정조가 성군이 됐고, 질투와 분노로 일관한 어머니 폐비 윤씨 탓에 연산군은 폭군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조선의 왕실 교육에 관해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세종 연산군 인종 경종 사도세자 정조 등의 예를 통해 이들이 어떻게 교육받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살피고 있다.
부산 부경대 교수인 저자는 조선왕실사 전공. 지난해 이미 ‘궁녀’라는 책을 출간해 대중의 인기를 얻은 바 있다.
영조는 맏아들이 죽은 뒤 7년 만에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곧바로 원자(元子)에 책봉했다. 그리고 제왕 교육을 하기 위해 그를 멀리 떼어놓고 신하에게 맡긴 채 별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결국 부모와 자식은 낯선 관계가 됐다. 그렇다 보니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늘 무서웠다. 영조는 쭈뼛쭈뼛하는 아들을 심하게 혼냈다. 아버지에 대한 사도세자의 두려움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졌다. 영조의 질책을 받으면 사도세자는 사람들을 때리거나 죽임으로써 스트레스를 풀었다. 영조는 더욱 분노했고 이것이 사도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어린 시절 부모의 무관심이 사도세자의 비극을 초래한 것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반면 정조의 성공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현명한 교육에 힘입은 바 크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낳았을 때, 사도세자와 영조의 불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홍씨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극진히 사랑했다.
남편 사도세자가 변을 당했을 때도 마음을 다잡고 지혜로움을 잃지 않았다. 정조를 위해서였다. 특히 홍씨가 정조에게 복수심을 불어넣지 않고 영조의 성은에 감사하라고 가르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와 달리 연산군은 조선 왕실 최악의 태교 실패작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왕비가 임신하면 왕은 밤 생활을 근신하는 것이 조선 왕실의 예법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비 윤씨가 연산군을 임신하자 두 명의 후궁과 관계를 맺었고 후궁들도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윤씨는 후궁들을 극도로 질투하고 증오했다. 성종과의 싸움도 잦아졌다. 두 후궁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저자는 연산군의 포악성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본다. 어머니 윤씨의 증오심이 뱃속의 연산군에게 최악의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근신하지 않은 아버지 성종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심성을 중시하는 왕실 교육 이야기도 흥미롭다. 태아의 정서를 위해 임신 중엔 궁궐에서 매를 때리는 형벌을 중단했던 태교 방식,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았을 때 비단이 아니라 오래된 무명천 강보를 씌워 검소한 심성을 길러 주려 했던 일 등등.
학문 교육은 대개 5세 전후에 시작해 즉위 이후까지 계속됐다. 왕위에 오르면 학식과 덕망 높은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토론도 했다. 이를 경연(經筵)이라 불렀다. 일종의 평생교육이다. 원자 및 세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영조가 조선 후기 번영의 토대를 구축한 것도 지속적인 경연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의 왕실 교육은 이처럼 태교부터 유아기, 소년기, 즉위 이후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이면서도 치밀하게 이뤄졌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부모의 사랑과 지혜였음을 이 책은 담담하면서도 선명한 어조로 말해 준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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