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첼로를 배우러 가는 기분은 어떤지요.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충만한 느낌이랍니다.
멀리 떠나지 않고도 알차기만 한 위크엔드 라이프!
가족간의 소통, 작은 자연과의 대화, 구속받지 않는 게으름….
여기 그런 위크엔드 라이프가 있답니다. 》
당신의 주말은 어떤 빛깔입니까?
산업화 시대, 주말에 회사 일을 집으로 가져오는 게 미덕이었다.
이후 한국에서는 1980년대 말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등에 힘입어
여가 활동이 두드러졌으나 대체로 대중 소비형에 머물렀다.
주말에 떠나는 ‘야외 나들이’가 최고의 여가 활용 방법이었던 것.
그러나 7월 주5일 근무제 전면 시행을 앞둔 최근 주말 여가 활동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매주 나들이를 갈 수 없는 데다 주말 이틀의 여유를 ‘지적 리프레시먼트’등 자기만의 개성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활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간 대화가 가득한 브런치(brunch)를 즐긴 뒤 공원을 산책하는 스타일리시 위크엔드 부부를 비롯해 정원이나 텃밭 등을 통해 ‘작은 자연’과의 대화를 즐기고, 감성적 문화적 자극을 위해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라며 보디 케어 숍에서 주말을 여유롭게 보내는 이들도 있고, 주중 모자랐던 소통의 갈증을 풀기 위해 매주 친구들과 사교 파티를 여는 이도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주중과 주말의 경계를 구분하면서 주말을 단순히 ‘나들이’가 아니라 새로운 리프레시먼트나 레크리에이션,
스타일을 위한 소중한 시간으로 여기는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의 미래는 여가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여가의 활용 방안이 가치 추구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주말을 보내는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새로운 ‘위크엔드 리포트’를 작성했다.
○ 브런치의 소박한 즐거움
주부 김선주(30) 씨는 정보통신업체 과장으로 일하는 남편 우창진(29) 씨, 네 살배기 아들 지민 군과 함께 매주 토요일 스타일리시한 카페를 찾아다니며 브런치를 즐긴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테라스 카페에 앉아 생크림이 곁들여진 벨기에 스타일 와플, 뉴잉글랜드 클램 차우더 수프, 팬에서 구운 계란 요리와 소시지, 딸기잼과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먹으면서 가족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보면 주말은 주중과 완전히 다른 생활이 된다.
김 씨 가족의 주말 브런치는 1년 전 시작됐다.
육아에만 몰두하던 그가 어느 날 카페에 갔을 때, 옆 테이블에 앉았던 한 부부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세련된 차림의 그 부부는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채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평소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과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주말이라는 사실을요.”
그날 이후 김 씨 가족은 ‘카페 74’ ‘텔 미 어바웃 잇’을 비롯해 가나 아트센터 내 ‘카페 모뜨’ 등에서 여유로운 브런치를 먹은 뒤 일산 호수공원, 도산공원, 한강시민공원 이촌지구 등에서 산책을 한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싸이월드에 올리는 사진들은 한가로운
일상의 기록이다. 그들에게 주말은 스트레스 없는 피크닉이다.
○ ‘작은 자연’과의 대화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 김지은(35) 홍보실장의 주말은 집 옥상에 마련된 작은 텃밭에서 시작된다.
직장에서 은퇴한 김 씨 아버지의 소일거리로 만든 한 평 반 남짓의 이 텃밭은 이제 그들 가족의 가장 소중한 주말 친구가 됐다. 주중에는 매일 아침 아버지가 깻잎, 완두콩, 쑥갓, 호박, 상추, 고추 등을 돌보지만 주말에는 김 씨가 손수 물을 주고 하얗게 타들어간 고추인 희아리도 정리해 준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비 오는 주말 옥상에 올라가 일본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처럼 까만 우산을 받쳐 들고 “나와라, 나와라”고 노래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텃밭의 식물들은 새로운 새싹들을 돋워 낸다.
“자연은 거짓말하지 않아요. 성실하게 정성을 다하면 그만큼 행복과 기쁨을 돌려주지요. 주말 만이라도 초록 생명체들과 대화하다보면 삶의 태도가 겸허해집니다. 그 방법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김 씨 가족은 주말 점심 때 모여 텃밭 식물로 만든 향긋한 건강 샐러드를 즐긴다. 간장, 참기름, 고춧가루, 깨소금만 곁들이면 된다. 가끔 도토리묵과 메밀묵을 손가락 크기로 툭툭 썰어 넣으면 더할 나위 없는 주말 별식이다.
○ 은밀한 기쁨 문화 콘텐츠
웨스틴조선호텔의 안주연(33) 씨는 주말이 되면 그냥 TV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평소 보려고 했던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몰아서 본다. 그가 애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피디박스(www.pdbox.co.kr)’ ‘핫디스크(www.hotdisk.co.kr)’. 토요일 오전 이들 사이트에 접속해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wives)’과 ‘퀴어 애즈 포크(Queer as folk)’, 일본 드라마 ‘분기점의 그녀’ ‘아네고’ 등을 유료로 다운받는다.
이들 사이트에는 대부분의 시리즈가 올라와 있어 주말에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안 씨는 5시간씩 한 시리즈를 보기도 한다. 특히 대부분 국내에서 방영이 안 된 프로그램이어서 앞서가는 은밀한 기쁨도 누린다.
광고대행사 그레이프 커뮤니케이션즈 이상훈(41) 부국장은 주말 오후를 주로 서점에서 보낸다. 디자인 팬시 문구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문구류 코너에 먼저 들르고 신간 서적, 문화 예술, 여행, 마케팅, 만화, CD와 DVD 코너를 차례로 둘러보면 서너 시간은 금세 흐른다. 그는 “이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으로 서점에 나와 있는 책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흐름이 한눈에 잡힌다”고 말한다.
5권 정도 책을 고른 뒤 하얏트 호텔 서울의 테라스 카페나 스타벅스 커피점에서 책을 읽는다. 집에서보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카페에서 집중이 잘 된다. 예쁜 독서수첩에 마음에 드는 문구를 메모하며 읽는 맛이 쏠쏠하다.
○ 파티에서 얻는 새로운 사람들
프리랜서 사진작가 이승하(32) 씨의 주말은 평소 만날 수 없었던 이들과의 만남이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이층 단독 주택에 사는 그는 매주 말 홈 바비큐 파티를 연다. 초대받은 이들이 친구를 한두 명씩 데려와 파티 인원은 10여 명에 이른다.
이 씨는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30여 평의 정원에서 숯불 화로 위에 목살과 삼겹살을 굽고, 마요네즈와 가쓰오부시가 얹혀진 일본식 빈대떡도 만든다. 파티에 오는 이들이 멸치 주먹밥, 유기농 와인, 디저트 케이크 등을 가져온다. 이 씨는 파티 비용도 참석자끼리 분담하기도 한다.
“홈 파티를 열면 처음 만난 사이라도 금세 가까워집니다. 밖에서 만나는 것과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는 것은 그 느낌이 분명 다르니까요.”
UBS 증권 정재호(30) 과장은 1년 전부터 한 달에 두어번 주말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와인 바 ‘라포도’를 5시간 정도 빌려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 등과 와인 파티를 연다. ‘뵈브 클리코’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새로 알게 된 사람만 100여 명에 이른다. 회사의 딜링 룸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주중에는 점심도 배달해 먹어야 하는 정 씨에게 주말 와인 파티는 생활의 활력소다. 와인 파티를 연 다음날에는 모교인 고려대 도서관에 가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독서를 한다.
○ 나를 위한 ‘작은 사치’와 재테크 공부
바디샵 정희영(32) 신사업개발팀장은 주말에 정기적으로 피부 관리와 보디마사지를 받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필라테스를 배운다. 비타민과 미백 성분을 얼굴에 바르고 스트레칭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 주는 그의 주말 생활은 매일 밤 11시에 퇴근하는 주중 생활에 대한 보상이다. 그가 누리는 주말의 ‘작은 사치’에는 월 30만 원이 든다.
얼마 전에는 4박 5일의 휴가를 내 친구와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가서 스톤 세러피와 보디 스크럽 마사지를 받고 왔다. 3시간에 4만 원 정도였으니 국내와 비교하면 저렴한 가격이었다.
LG텔레콤 고한서(34) 단말데이터 품질팀장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매주 일요일 아내와 함께 부동산 경매와 신도시 투자 관련 강좌를 수강해 재테크 정보를 얻는다. 평소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주말은 자기만의 관심 분야를 집중할 수 있는 유용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제일기획 엄남현(33) 대리는 주말에 박정어학원에서 3시간씩 영어를 배운다. 주말 오전 시간을 학업에 할애하는 그를 두고 여자 친구는 ‘계획쟁이’라고 부른다. 결혼을 늦추며 홀로 독립해 사는 직장인이 많아지면서 남녀 간 데이트도 극장과 야외를 벗어나 서로의 집에서 함께 요리하고 비디오를 빌려 보는 형태가 많아졌다. 엄 씨도 그렇다.
○ 아마추어 연주자의 행복한 여가
삼성그룹 미래전략팀 정지은(31) 과장은 2년 전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바이올린을 배운다.
인터넷을 통해 10만 원대의 저렴한 바이올린을 구입해 처음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주중에는 연습할 시간이 없어 주말 문화센터를 활용하는데도 실력이 쌓여간다.
“어차피 전문 연주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에, 주말에만 집중했는데 배움 자체가 어떤 나들이보다 기분전환 효과가 있어요.”
인터넷 여행사 ‘쉘 위 투어’의 박삼식(37) 사장도 매주 일요일 자신이 다니는 서울 용산구 도원동의 한 교회에서 첼로를 배우고 있다.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등 다양한 악기를 전공한 신자들이 자원봉사로 가르쳐 준다. 첼로는 박 씨가 어렸을 때부터 해보고 싶었으나 생활에 치여 다루지 못했던 악기였다. 박 씨는 “주말에 비로소 꿈을 이뤘다”며 웃는다.
그는 첼로 연습이 끝나면 샌드위치와 유부초밥을 만들어 달라이 라마의 ‘용서’ 등 책을 들고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으로 피크닉을 나선다. 친구 조카와 함께하거나 혼자 가기도 한다. 그는 “주말 첼로 연습과 독서는 주중 업무에 지친 정신을 추스르는 놀이이자 휴식”이라고 말한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
▼직장인 10명 ‘20자 나의 주말은…’▼
△냉정과 열정 사이(홍익대 미대 간호섭 교수·남·36)
△고3 학생들의 점심시간 같은… (아베코 고인준 과장·남·33)
△주중보다 더 바쁜 자기 계발의 엔진 구동(서울대 의대 한영근 교수·남·34)
△요가 산책 영양식 등 애인과 함께 건강 챙기기(와인나라 김혜주 과장·여·32)
△한없는 게으름의 미학에 대한 동경(플레시먼 힐러드 코리아 최원희 과장·여·31)
△막혔던 아이디어가 낯선 곳에서 열리는 통쾌함(서울옥션 마케팅팀 구화미 씨·여·29)
△다이어리(업무)는 느려지고 다이얼(휴식)은 바빠지는 이상증후군(대홍기획 제작팀 윤주혜 부장·여·29)
△전업 주부의 육아 노하우를 따라잡는 시간(SBS 라디오본부 이윤경 PD·여·32)
△가정인과 사회인의 조화(TU 미디어 길덕 대리·남·32)
△나의 주말 라이프의 자전축은 아내(LG경제연구원 홍석빈 책임연구원·남·35)
▼나들이서 취미 즐기기로 한국인 여가트렌드 변화▼
긴 노동 시간과 소극적인 여가 활동을 되풀이했던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은 1990년대에 변화하기 시작해 주5일 근무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급속히 바뀌고 있다.
여가의 자기실현적 의미가 강조되면서 휴식과 소일거리 차원의 여가 활동에서 벗어나 가치 창조형 여가 활동이 증대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원은 근로시간 단축이 가져오는 뉴 트렌드로 △시간 소비형 여가 △가족 중심주의 여가 △여가의 문화화와 학습화 △디지털화와 탈디지털화의 공존 △참여와 체험형 여가 등을 꼽는다.
여가 시간이 부족하던 예전에는 한정된 시간에 돈을 쓰는 금전 소비형 여가가 주를 이뤘지만 요즘에는 여러 곳을 순회하는 관람형 여가 대신 한 장소에 머물며 충분히 즐기는 시간 소비형 여가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핵가족화와 맞벌이 부부의 증가, 회식의 감소 등으로 가족주의가 부활했으며, 디지털혁명의 가속화는 인터넷 가상공간에서의 여가 문화와 더불어 반대 성격의 자연회귀형 여가 문화도 발전시켰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신겸 연구원은 한국 사회의 여가 문화 단계를 ‘무작정 밖으로 나들이하는’ 일차적 단계를 지나 ‘나홀로 즐기는 취미 생활 단계’에 와 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취미를 공유하는 마니아 동호인 커뮤니티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1987년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한 일본의 경우 도입 초기에는 테마 파크, 골프 등 레저 활동이 활발했으나 버블 경제가 붕괴하면서 집 근처 피트니스 센터에서의 조깅, 애완동물 키우기와 정원 관리 등 여가 활동이 일상으로 편입됐다.
또 전원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바캉스가 활성화된 유럽, 시간 급여 개념이 강하고 아웃도어 문화가 발달된 미국에서도 점차 테마가 뚜렷한 여가가 각광받고 있다.
이지평 연구원은 “여가 문화가 성숙할수록 삶의 한 부분이라도 호사스럽게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 여가의 지적 교양화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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