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70>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30일 03시 16분


“관중 땅만으로 넉넉하다는 사람이 함곡관을 나온 지 일년이 넘도록 중원(中原)을 기웃거리고 있는가? 거기다가 형양 서쪽의 땅은 이미 과인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왕이 무엇을 과인에게 들어다 바친다는 것인가?”

며칠 전의 일로 마음이 어지럽던 패왕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육고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육고가 미리 준비해온 대로 한신과 팽월, 경포를 들먹이며 그들의 세력을 과장했다. 그 말을 듣자 며칠 전 한왕의 세 갈래 사자가 형양성을 빠져나간 게 한층 더 께름칙했으나, 패왕은 여전히 내색 없이 말했다.

“그것들은 모두 과인이 형양성을 깨고 한왕 유방만 사로잡으면 허깨비가 되어 흩어질 머리 없는 귀신들이다. 허나 네가 명색 제후의 사자로 와서 하는 말이니 내 장상(將相)들과 그 일을 논의는 해보겠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범증을 불러오게 했다.

“유방이 사자를 보내 휴전을 청해왔소. 아부(亞父)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와서 싸움을 하다 그만두는 것은 반드시 그럴 까닭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지금 한군과 더 싸울 수 없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범증이 무슨 소리냐며 묻는 듯한 눈길로 패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패왕이 구차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과인이 싸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휴전으로 얻을 게 있어서요. 유방은 과인에게 형양 동쪽을 모두 들어다 바치기로 했소.”

“유방만 죽이면 형양 동쪽만이 아니라 천하가 모두 대왕에게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가 조나라와 연나라를 차지하고 있고, 팽월과 경포의 무리도 곧 움직일 것이오.”

패왕이 비로소 마음속의 걱정 한 자락을 펼쳐 보이자 범증이 차게 웃으며 받았다.

“대왕, 또 장돌뱅이 유방에게 속으셨습니다. 바로 말씀드리자면 저들이 술과 고기로 흥청거릴 때나 불시에 군사를 내어 에움을 뚫고 세 갈래로 사자를 내보낼 때는 신도 적잖이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휴전을 청하는 한나라의 사자를 맞고 보니 오히려 모든 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합니다. 지금 성안의 적은 식량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급히 구하러올 원병(援兵)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패왕도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항왕도 그쯤 되자 그 며칠 형양 성안의 한군이 벌인 일들이 무엇을 노린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때 다시 범증이 어린아이 달래듯 간곡하게 권했다.

“대왕, 지금이야말로 유방을 잡아 죽이고 한나라를 쳐 없애기에 절호(絶好)한 때이니, 부디 이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번에 유방의 목을 얻지 않고 다시 놓아 보낸다면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말에 패왕이 시뻘게진 얼굴로 칼자루를 잡으며 소리쳤다.

“알겠소. 아부(亞父). 내 이제 사자로 온 자의 목부터 잘라 그 주인 유방의 간교한 속임수를 벌하겠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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