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74>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3일 03시 3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하나같이 그럴듯하게 짜인 말들인 데다 넉넉하게 푼 황금이 뒤에서 거드니 한군 첩자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는 곧 초나라 군중(軍中)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장수들은 패왕 항우를 두려워하여 들어도 못들은 척하고, 패왕은 또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그 말이 잘 들어가지 않은 탓인지 당장은 이렇다할 효과가 없었다. 진평이 첩자들을 푼 지 열흘이 지나도 초나라 군중이 수런거리는 기색은커녕 항우의 불같은 공격만 기세를 더해갔다.

“항왕이 저리도 무섭게 성을 들이치는 것은 아직도 범증을 믿고 그 말을 따른다는 뜻이오. 거기다가 초나라 장졸들도 아무런 동요가 없으니 어찌된 일이오?”

걱정이 된 한왕이 진평을 불러 물었다. 그러나 진평은 별로 걱정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원래가 이런 일은 바로 성과가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며칠 더 두고 보시지요. 소금 먹은 놈이 물켜는 법이니, 머지않아 반드시 무슨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무얼 믿는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까지 띠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닷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초나라 군사들의 공격이 끊어지더니 초군 전령(傳令) 하나가 문루 아래 나타나 소리쳤다.

“성안의 한군은 듣거라. 내일 우리 대왕께서 사자를 성안으로 보낼 터이니 한왕에게 그리 전하고 왕사(王使)를 맞을 채비를 하라 이르라!”

“싸우다 말고 난데없이 사자는 무슨 사자냐?”

문루를 지키던 한나라 장수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초군 전령이 대답했다.

“너희 한왕도 지난번에 사자를 보내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우리 대왕께서 사자를 통해 물으실 것이 있다 하셨다.”

그러자 문루를 지키던 장수가 한왕에게로 가 그 소식을 전했다. 한왕이 곁에 있던 장량과 진평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난번 육고가 과인의 사자로 갔을 때 항왕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듯 내쫓지 않았소? 그리고 이 보름 말 한마디 없이 성만 짓두들기더니 갑자기 어찌된 일이오?”

“아마도 이제야 우리가 황금과 사람을 푼 효험을 보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항왕에게도 우리에게서 엿보고 싶은 것이 생겼음에 틀림없습니다.”

진평이 나서 그렇게 대답했다. 한왕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진평에게 물었다.

“항왕이 우리에게서 무얼 엿본단 말이오?”

“드디어 항왕의 의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의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한나라와 내통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함입니다. 이제 범증을 항왕에게서 영영 떼어놓을 독수(毒手)를 펼쳐볼 때가 왔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대왕께서 신의 계책대로만 따라 주신다면 범증은 앞으로 항왕 곁에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진평은 그렇게 말해놓고 이어 귓속말로 한왕에게 무언가를 길게 일러주었다. 듣고 난 한왕이 장량을 돌아보며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무서운 계책이구나. 실로 독수라 할 만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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